삶의 단상 /
어제가 중복이었다.
중복에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는 옛말이 실감 나는 하루였다. 바람이 불지만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에 역부족이다. 그렇다고 에어컨을 켤 수가 없다. 밀폐된 공간이 주는 답답함 때문이다. 책상에 앉아도 더운 날씨에 머리가 멍하다.
이런 날은 밖으로 나가는 게 상책이다.
가까운 곳에 있지만 잘 가지 않는 갈산으로 산행을 결정한다. 갈산은 산행이라는 거창한 말 대신 산책이 어울리는 산책길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갈산은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산이다.
갈산공원에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내가 선호하는 길은 향림사에서 시작하는 길이다. 이곳은 아파트 단지로 개발이 되었지만 이 주변에 옛집이 몇 채 남아있고, 더러 단독주택을 헐고 지은 다세대 주택들이 있는 곳이다.
골목을 조금 올라가면 이렇게 기이한 모습 보게 된다. 집을 빙 둘러싸고 이렇게 화분이 촘촘히 놓여있다. 단위는 물론 난간에도 옥상에도 화분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처음 이 집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은 화분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화분의 수도 그렇지만 화분의 크기도 엄청나다. 그리고 저 많은 화분들의 무게가 엄청날 것인데 저 집이 어떻게 버티는 지도 궁금했다. 혹시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다.
고추며 방울토마토 들깨 심지어 토란까지도 화분 가득 심어져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채소들이 하나같이 부지런한 농부가 지은 것처럼 튼실하고 풍성하다는 것이다. 한참 올려다보고 있는 데 한 아저씨가 자전거를 끌고 와 집 앞에서 멈춘다.
"아저씨가 키우시는 거예요?"
넌지시 여쭤보니 그렇단다. 어떻게 이렇게 잘 키우셨냐는 물음과 함께 혹시 집에 균열이 가거나 하지는 않은지, 물은 어떻게 주는지, 어디서 시중에서는 구할 기 힘든 이 큰 화분들은 어디서 구했으며 흙은 어떻게 구했는지.... 등등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여쭤보았다.
70대의 아저씨는 이곳에서 5대째 살고 있는 토박이라고 하셨다.
아파트로 자신의 소중한 고향이 없어지는 것이 싫어 개발에 동의하지 않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곳에 30여 년 전 신축한 지금의 집에서 살고 있단다.
화분과 흙은 아파트 공사 때 철거 현장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화분의 크기가 한 아름이나 된다. 고추 농사를 잘 지어 김장은 충분히 하시겠다며 100포기쯤 되느냐고 묻자 300포기도 넘는단다.
실속 있는 도시농부다.
난간과 계단참에 있는 화분의 물을 하나하나 물조리개로 준다니 아저씨가 얼마나 부지런하신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요즘 금값인 들깨도 나보다 더 크고 잎도 벌레 먹은 것 하나 없이 싱싱하다. 들깨를 길러 본 적이 있는 나는 안다. 들깨가 얼마나 병충해에 약한지.. 방법을 여쭤보았다.
"약을 쳐주지, 약 안 주면 하나도 키울 수 없어."
아저씨는 며칠 전에도 들깻잎 300장이나 따서 팔았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이렇게 채소를 가꾸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지금 직장 생활을 하는 현역이라는 아저씨. 아저씨는 모 대학 경비로 근무하는데 경비의 특성상 격일제 근무라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농작물을 기르신다고 한다.
다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아주 옛날에나 볼 수 있었던 얼음집이 지금도 그대로 있고,
도로에 집이 있기도 하다. 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수용을 하지 못한 모양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쌀집이 있던 자리에 4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사찰이 이 골목의 마지막 건물이다. 부지는 크지 않지만 사찰 건물은 웅장하다.
사찰 옆 계단부터가 갈산이다.
나는 이 골목길이 좋다. 골목길에서 만나는 오래전 풍경도 좋고, 집 앞의 작은 터 곳곳에서 기르는 채소도 정겹기 때문이다. 욕심이겠지만 이 골목이 이대로 오래오래 남아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