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속을 힘차게 걷는
너는 더 잘할 수 있다 그래야만 한다.
자기 암시가 강해지기 시작한 건 20대를 넘어서부터이다.
이성보다 이상에 가까운 목적으로 나에게 기대하고 있다.
잘 풀리지 않고 어물쩍대면 언제나 스스로를 자책하고 질타한다.
극단적인 마음 가짐은 올바른 방향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흙 알맹이 같은 고집을 부리고 있다.
다시 또 이틀에 한번 꼴로 잠에 든다.
분명 피곤함을 느끼는 상태인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이 수면을 방해한다.
나를 이토록 못살게 구는 이유는 무엇일까.
뭐든지 잘해야만 한다는 자기 암시인가.
떨어진 가족들에 대한 걱정 때문인가.
결국 나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다.
이런 반복된 질문은 어느새 또 떠있는 해를 보게 된다.
이 세상은 아주 잘 만들어져 있다.
흩날리는 먼지 한 톨부터 급작스럽게 쏟아지는 빗방울의 모험까지 이유 없는 존재는 없다.
나 또한 그렇게 굳게 믿고 있다.
터벅터벅 장댓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이 30대 아저씨는 그럼에도 내 가족에게 듬직한 사람이 되고 싶은 존재라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겨본다.
지난날의 석사 졸업식은 화만 가득했다. 아버지 어머니께 한시라도 빨리 졸업식장을 떠나기를 재촉했기 때문이다.
당시 연구실 동료들을 소개해드리기 싫었다. 당연히 가족들도 그저 재촉하며 떼쓰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생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들과 접촉하며 던진 당신의 첫마디는
우리 아들 잘 봐주세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그들의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화가 난 게 아니라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간 쓸게 따윈 다 줄듯한 나의 가장 소중한 두 분에게 그런 취급을 받게 만든 것이 미안한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당시 연구실 선배의 돌잔치를 축하해 줬다.
오롯이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30만 원 상당의 금 한 돈을 선물했다.
그런데 친하지도 않은 인간관계를 증명이라도 하듯 수령 당일 현금화로 답변해 줬다. 참 화가 났었다.
학연 지연 혈연 하나 없는 당신의 아들을 위한 마음이 나를 더 잠 못 자게 만든다.
이번에는 그렇게 보여드리고 싶지 않다.
당신의 아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나 또한 멋적인 아들로서 답례하고 싶다.
능력 있는 자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력뿐이다.
오직 노력 만이 성취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잘 만들어진 세상이 나에게 재능을 주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극복해 나갈 것이다. 그 끝에는 가족들과 함께 할 예정이다.
두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