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우리 집 대장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을 뛰라며 호통치는 목소리, 상대방 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작정 밀어붙이는 태도, 항상 화나 있는 얼굴, 앞 뒤 꽉 막힌 아버지는 그 시절 참 미웠다.
그래서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회피하는 횟수가 잦을수록 가까워지기는 더욱 어려웠다.
8살, 나는 학교 앞 분식점의 100원짜리 게임기를 너무 재밌어했다. 달달한 떡볶이 냄새에 각종 과일 향이 나는 그 좁은 공간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 내 속은 아차 싶은 불안감이 이미 안중에도 없다. 이런 네모박스 게임기는 어디 가서 구할 수 있는 건가. 해는 저물어 간다.
강ㅌㅅ!!!
화가 난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내 이름을 외치셨다. 다른 애들도 아직 안 가고 여기 있는데, 왜 우리 아버지만 나한테만 뭐라 하는 걸까. 그렇게 가게로 끌려가서 크게 혼난 기억이 있다. 사실 이것도 한두 번이지, 세 번째부터는 오토바이 소리만 들어도 눈치채고 숨었었다. 그러다 늦은 시각 가게로 간 적이 있었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나신 것이 기억이 난다. 참 못났구나.
그럼에도 아버지는 내게 손찌검을 하신 적이 없다. 혼나도 밥은 굶기지 않으셨다. 나는 공부를 한참 시작하고 있었을 때 아버지가 이렇게 화를 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당신의 자식이 혹여나 모진 길을 가게 될까 봐 하는 걱정이었다.
어차피 박사 될 거였는데 왜 그때 그렇게 화를 내셨어요.
이미 알고 있는 답을 여쭙자, 막상 직접 듣고 나니 눈물이 핑 돈다. 우리 집 대장님의 소망은 언제나 내 성공이다. 어머니나 아버지나 똑같은 사람이었다. 화만 내는 그 시절 두 분 모두 20대였다. 자녀와 대화가 서툰 사사람일 뿐이다. 부모는 처음이니까.
어느새 아버지가 더 이상 미워지지 않을 때, 나는 아버지와 이미 대화를 자주 나누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먼저 다가온 건 언제나 아버지였다. 당신의 아들은 항상 뒤늦게 뒷북을 친다. 어리석다 참.
아들 이제 가면 보기 힘든데...
독일로 출발하기 전 새벽 3시. 왜 아직도 안 자냐고 화내는 여사님한테 던진 한마디였다.
이번 출국은 참 후유증이 오래간다.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다. 길 잃지 않도록 자주 빛을 밝혀주었다. 물론 나는 굳이 공부가 아닌 다른 길에 들어섰었어도 이들을 미소 짓게 만들 예정이었다. 대화든, 행동이든 나의 모험의 불씨가 커져가며 이들을 비출 수 있게 될 때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