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형보다 더 중요한 것
요새 첫째 제리는 자꾸 묻는다.
"엄마, 나는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해?"
여섯 살인데 벌써 결혼 상대를 고민하다니, 귀엽기도하고, 참 성급하기도 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음 여러사람 만나보고, 너랑 잘 맞는 사람을 만나야지."
두루뭉술한 말로 대답했지만, 지금은 그 말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제리가 성인이 된다면 이건 꼭 말해주고 싶다.
남편을 처음 봤을 때, 그는 내가 싫어하는 조건을 거의 다 갖춘 사람이었다.
담배를 피웠고,
게임을 좋아했고,
허세도 가끔 보이고,
친구들도 많았고,
말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니까 '어릴적 부터 그려온 이상형'과는 정말 정반대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 이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상형은 조용히 무너졌다. 내가 믿어왔던 기준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이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나와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며 눈을 반짝였다. 평범했던 내 인생에 "재미'라는 단어를 꺼내준 사람이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랑 세상에서 재미있는거 다 하고 다니자."
그 말 한마디에 내 미래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뭔가 꼭 해야한다.'가 아니라 '조금은 놀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나를 보러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해주려고 했다. 두 번째 만남에 " 강화도로 드라이브 가보고 싶다"는 나의 농담 같은 말 하나를 지켰다. 한 시간을 달려와 나를 태우고 강화도로 향하던 모습. 망설임 없이 나에게 오던 태도. 그 무모함이 이상하게 참 따뜻했다.
남편은 내 마음을 가장 빠르게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담긴 미세한 감정까지 놓치지 않았다. 작은 선물에도 크게 감동하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늘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면서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온 마음을 나에게 몰입해 '지금 여기의 나'만 바라봤다.
30대의 연애는 현실적이고 복잡하다. 조건도 중요하고, 미래도 계산해야한다. 누구에게나 시간을 넉넉히 쓸 여유가 없다. 그런 현실 속에서 나를 '보석처럼' 대하는 이 남자가 순수해보였다. 몇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이 사람과 결혼해도 후회는 없겠다.'하는 확신이 들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보면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나는 어떤 건 감당할 수 있지만, 어떤 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견딜 수 없는 지점이 곧 나의 결핍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나에게 많은 결핍이 있지만, 내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결핍은 마음의 빈곤이었다.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 감정을 가볍게 다루는 사람, 여유 없는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
그걸 깨닫는 순간, 이상형으로 쌓아두었던 조건들은 하나씩 의미를 잃었다.
어느 날 나는 너무 지쳐서 남편에게 하루 동안 일었던 일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도서관에서 아이아 울어 뛰쳐나온 일, 식당에서 제리가 울고 달래지지 않던 순간, 카페에서 아이들이 강아지를 만져 사장님께 혼난 일까지.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많이 힘들었겠다."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나좀 안아줘. 나 고생 많았다고 말해줘."
남편은 담담하게 말했다.
"고생 많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가라앉았다. 남편은 원래 '공감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사람이다. 그런데 유독 나에게는 공감의 말을 자주 건넸다. 해결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 내 옆에서 마음을 받쳐주는 그 말한마디면 충분했다.
만약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너만 힘들어? 나도 오늘 하루종일 힘들었어. 엄마가 그 정도는 당연히 하는 거 아니야? "
그랬다면 내 마음은 또 한번 부서졌을 것이다.
결혼하고 나니 이상형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결혼 참 잘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사람을 선택할때 진짜 중요한 건 조건이 아니라, 나의 결핍을 채워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요즘 내가 남편에게 묻는다.
"아직도 내가 좋아?"
남편은 항상 똑같이 대답한다.
"당연하지. 사랑하지."
그 말은 여전히 나를 웃게 만든다. 그 말속에는 계산도, 부담도, 조건도 없다.
제리야, 결혼은 '이상형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너의 가장 큰 결핍을 조심스럽게 안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야.
너와 함께 있을 때 너 자신이 더 따뜻해 지는 사람.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사람.
그의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면 이상형이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