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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환 Jan 17. 2024

해파랑길을 꿈꾸며

해파랑길 원정대 결성


어느 날, 그는 문득 뭔가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서걱서걱 김치를 썰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마음은 어둠에 빠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런 허전함은 누구나 가끔은 느끼는 감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은 다른 날과는 달랐다. 그 허전함이 더 깊게 밀려왔다. 그날은 수요일이었고, 그는 수심회 오찬에 참석해야 했지만 그 마저도 심드렁했다. 그는 어찌할까 잠시 망설이다 결국 오찬을 포기하고 주저앉아 김치를 썰고 있는 중이었다. 어릴 적 학창 시절 도시락을 난로 위에 얹어 데워 먹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렇게 김치를 썰어 냄비에 깔았다. 그리곤 초점을 잃은 눈은 멍하니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렇게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런 심란한 허전함과 약간의 우울함에 잠겨 있던 그런 날이었다.


그는 김치볶음밥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특히 겨울에는 김장 김치를 깔고 들기름 한 숟가락 넣어 도시락처럼 해 먹는 것을 이따금씩 즐기곤 하였다. 하지만 그날의 김치볶음밥은 완전히 망작이었다. 그의 마음이 흐릿해지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데, 제대로 된 김치볶음밥이 나올 리 만무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허전함을 김치볶음밥에 담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자신의 허무함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허무함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그가 그렇게 눈을 어디에도 두지 못하고 허공을 가르는 날이 늘어가는 이유 중 하나는, 언제 무엇 때문에 어깨를 다쳤는지 그동안 다녔던 등산을 쉬면서 집에 머무는 날이 많아졌고 길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치료는 약 10개월 간 이루어졌고 완전히 치료도 되지 않은 상태였던 어느 날, 늘 그렇듯이 그는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함께 식당 근처의 카페를 찾아 나선다. 봄이 다가오고 있지만 날씨는 봄 같지 않았던 제법 찬 바람이 불던 날이다.


자리를 옮겨 앉은 경희는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부산 해파랑이 그렇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지인이 적극 추천하더라는 말을 덧붙이며 살짝 호기심이 생기도록 이야기했다. 그가 그녀로부터 해파랑길 이야기를 처음으로 접한 날이었다. 그녀의 해파랑길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한 두 해 전인가, 새벽부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장대비가 오던 날, 가늘어진 빗줄기를 틈타 주흘산으로 올라 문경새재를 걸었던 날이 떠올랐다. 어둑어둑해지는 해 질 녘, 새재 길을 따라 걷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늦은 시간에 걷기를 마친 그날이 그녀의 해파랑길 이야기를 들으며 더 새록새록 떠 올랐던 것이다. 그때 그녀가 알려준 문경새재 근처 상가의 맵지도 않고 담백하며 깔끔한 “이화령 짬뽕” 맛이 떠오르며 말이다. 신선하고 아름다웠던 새재 길을 걸었던 그날이 생각나며 그의 마음은 오랜만에 편안해지고, 허전함이 조금은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해파랑길을 경험해보고 싶어 졌다. 그곳에서 새로운 경치와 여운을 느끼며, 그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걷자는 수심회의 그 어마무시한(?) 여사친이 있는데, 더욱더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그의 마음은 이미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 수심회 친구들과 함께한 백령도, 대청도 여행에서 꽃무늬 머릿수건을 쓰고 “양촌리 부녀회장” 캐릭터로 저녁 만찬 자리에 나타나 친구들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주었던 그녀의 특별한 모습은 그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녀는 항상 자신만의 쾌활하고 시원한 에너지로 가득 찬 품성을 지닌 친구이다. 그렇게 시원시원하고 굵은 감정선은 그녀의 존재 자체에 담긴 상쾌함과 활기를 상징한다. 그녀의 주변에는 항상 까르르 넘어가는 경쾌한 웃음소리와 긍정의 힘이 가득하여 주변을 밝고 즐겁게 만들어 준다. 친구들은 그녀와 함께할 때마다 그녀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에 영감을 받으며, 함께 있는 동안에는 모든 고민과 피로가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웃는 모습만 봐도 박장대소 스타일이다. 그러한 웃음 속엔 그녀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늘 상황을 낙관적으로 마주하는 그녀의 시원시원한 성격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슬기롭게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리저리 감추는 것은 체질적으로 잘 안될 것 같아 보인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그녀의 경향이 아주 가끔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따듯한 정이 주변을 따듯하게 만드는 몸도 마음도 건강한 친구이다. 


그간 그녀와 함께 한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동안 보아왔던 그녀의 캐릭터는 그랬다.


과거에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수심회 친구들과 함께하지 못하였다. 그는 어떤 일이든지 맡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결하고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 늘 바쁘기도 했지만, 일주일 내내 거의 술을 마셨던 흑역사의 시대가 있었던 지라 주말을 이용하여 이루어지는 수심회 친구들과의 여행이나 활동에 대부분 참석하지 못했었다. 결국은 핑계였지만 말이다. 그가 친구들을 제대로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은 이유기도 하지만, 사람은 늘 주관적인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늘 오류가 있기 마련이라 누구나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단지 그는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친구들의 좋은 면 만을 보고자 애쓰고 헤아리는 편이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해파랑 길 이야기는 수년 전 컴컴한 산길을 겁도 없이 다녔던 수심회 맏언니 향순이와 함께했던 지리산 둘레 길을 완주한 에피소드로 이어졌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그는 그녀의 내면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해파랑 길을 걸으며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해파랑 길 이야기와 함께 봄이 찾아왔고 새로운 계절의 기운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만들었다. 그리고 봄의 따스한 햇살과 함께 그의 마음의 겨울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트남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친구들 사이에서 나눠졌다. 다양한 의견과 논의가 교차되며 결정이 내려졌다. 그들은 마침내 3월 하순에 베트남 냐짱과 달랏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들은 이러한 여행을 추진할 때 그를 상당히 신뢰하는 편이다. 언제부터 누가 그리 부르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그를 “대장님”이라 부르며 신뢰하고 있다는 그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고, 그는 무슨 대장인지는 모르지만 대장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여권을 모으고 계약금을 보내고 현지 여행사로부터 견적을 받아 친구들의 의견과 요청사항을 반영하여 계약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수심회 친구들과의 베트남 여행을 준비하였다. 물론,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추운 겨울과 허전한 마음은 그들과 함께 여행을 꿈꾸며 마치 봄눈이 녹아 없어진 듯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3월 하순, 냐짱의 푸른 바다와 고요한 달랏의 숲 속을 거닐며 그는 친구들과의 소중한 또 하나의 행복한 순간이 채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행복한 순간이었다. 출발부터 우당탕탕, 미국적자 비자문제로 베트남 입국이 불가능한 위기에 처한 친구 명실의 난감하고 급박한 사태, 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 부르게 된 이 사태를 진한 우정으로 해결하고 다녀온 이 여행 에피소드는 추후 베트남 여행 에세이로 공개될 예정이다.


4월이 시작되자, 그들은 본격적으로 해파랑 길 4박 5일 원정을 계획하기로 했다. 출발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이뤄지며, 목적지는 5코스 종점인 울산의 폐역인 구 덕하역까지 85km를 걷는 일정이었다. 실제로 걸으면 약 100km에 이르는 여정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초기 확정된 참여자는 그와 경희, 그리고 미연 세 명이었다. 한 명이 더 함께하였으면 했는데, 가장 유력한 "철각" 원철이 확답을 하지 않았다.


원철인 친구들로부터 “철각”이란 별명을 얻은 친구이다. 지금까지 마라톤을 뛰고 있는 몇 안 되는 회원 중 한 명으로 그만큼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기에 붙은 별명이다. 오랜 세월 여행을 함께한 지기이기도 한 친구이다. 그야말로 법 없이도 살 무던한 친구인데, 때론 직설을 피하지 않는 성품이고 사과할 일은 정확하게, 그리고 시원시원하게 사과하는 뒤 끝없는 친구다. 어쩌다 한 번씩 던지는 그의 재치 있는 행동과 말은 의외성과 희소성 때문에 더욱 좌중을 뒤집어지게 만드는데, 그의 이러한 재치는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렇게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힘의 원천은 아마도 구김 없는 그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함께 있으면 뭔가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의 포용력 있는 성품 덕분에, 그의 주변은 마치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이 둥지를 찾아 깃드는 자연의 이치처럼 늘, 꾸준히 머무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아무튼 경희와 미연은 열심히 설득(?)하였고 마침내 원철까지 합류하여 원정대는 네 명으로 확정되었다. 사실은 꼬셨다는 표현이 더 맞는 표현이지 싶다. 술 좋아하고 사람 무던한 원철은 결국 소주 석 잔이면 얼굴이 불그스레 달아오르는 경희가 술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꼬신 것이다. 이러한 소소한 에피소드로 그들의 해파랑길 여행은 시작부터 특별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그들의 해파랑 길은 구체와 되었다. 4월, 해파랑길 여정을 계획하던 그들은 단단한 기획보다 예정 없이 떠나는 여행의 필요성을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다. 계획된 일정과 숙소는 정하지 않기로 했다. 현지에서 상황에 맞게 대처하기로 하였다. 사전에 정해진 계획과 촘촘한 일정보다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훨훨 날고 싶었던 그들이었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모이게 마련인데, 비록 네 명이지만, 엄연히 수심회를 대표하는 해파랑길 원정대이기에 회비와 친구들의 찬조가 있었다. 재정을 담당할 총무는 미연이 맡기로 했다. 


미연, 그녀는 항상 밝은 미소를 지으며 친구들에게 다정하게 다가가는 친구였다. 회비를 관리하고 지출하며 원정대 살림을 맡는 이 역할은 원활한 해파랑길 원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고, 향후 해파랑길 걷기 여행에 참여하는 친구들이 더 많아진다면, 이 역할은 더욱더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언제나 밝은 미소와 붙임성 있게 “오빠!, 오빠!” 하며 친구들과 소통하는 그녀의 쾌활한 성품은 총무를 맡기에 타고난 듯한 장점을 탑재한 수심회의 어마 무시한 여사친 8명 중 한 명이다. 회비를 모으고 집행하는 일이지만, 그녀는 그것을 단순한 업무가 아닌 우정과 신뢰의 토대를 쌓는 일이라 여기며 하는 듯 보였다.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와 쾌활하고 명랑한 붙임성은 원정대의 결속력을 높이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큰 장점이었다. 그녀는 각 구성원이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단순한 동료가 아닌 가족 같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할 것이다. 친구들에게 늘 상냥한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장점은 십분 발휘되었고, 기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심회에서 그녀의 미소는 언제나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되는 마법 같은 힘을 지닌 친구이다. 해파랑 길을 향한 그녀의 미소 역시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었고 여정의 시작부터 함께하는 친구들에게 따뜻한 햇살처럼 다가왔다.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면 마음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차게 된다. 그 특별한 여정은 곧 시작될 것이다. 계획은 꿈을 구체화하는 중요한 단계이다. 그러나 이번 해파랑 길 원정에 있어서는 계획보다 꿈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결승선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거창하고 세부적인 계획보다는 해파랑길을 걸으며 순간순간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를 그리자는 꿈에 방점을 찍었고, 계획의 전부였다. 그들의 해파랑길 여행은 소소하고 작은 순간들이 모여 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결승선이 아니라, 그들의 여정 중 매 순간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결말이 될 것이다. 해파랑길을 따라 걷는 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특별한 순간들을 선물하며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특별한 목표를 세웠다. 65세가 되기 이전인 3년 내에 해파랑길 50구간, 공식거리 736.5km를 완주하는 것이다. 이 목표는 단순한 계획이 아니라,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전과 목표로써 그들의 여정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해파랑길에 새겨질 그들의 이야기를 더욱 행복한 기억들로 채워줄 것이다.


이 여정은 계획에 얽매이지 않고, 꿈을 따라가며 풍요로운 이야기로 가득할 것이다. 그들은 함께 걸어가며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작지만 아름다운 순간들로 자신들만의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해파랑길을 꿈꾸며 계속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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