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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환 Apr 25. 2024

잊을 수 없는 카파도키아 향기 항아리 케밥

인샬라 카파도키아!


그들의 여정은 이제 카파도키아 Kapadokya로 향한다. 과거 실크로드 무역의 중계지로 수 세기동안 번영을 누렸던 튀르키예 중부 중앙 아나톨리아의 중심도시 악사라이를 경유하여 네브셰히르로 들어갈 예정이다. 엊그제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오늘이 사흘째 여정이다. 


인간은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하나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두 눈이고, 또 하나는 상상의 눈이다. 특히 상상의 눈은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도 소리와 감각으로 세상을 보는 이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을 보는 방법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스테인리스 냄비 뚜껑과 유리 냄비 뚜껑을 통하여 볼 수 있는 물방울 보기와 같은 방법이다.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올라오고 유리에 닿아 다시 물방울로 변한다. 유리는 그런 변화를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뚜껑이다. 하지만 스테인리스 뚜껑은 냄비 안의 변화를 볼 수 없다. 하지만 지금쯤 물이 끓고 수증기가 올라와 뚜껑에 닿아 ‘물방울이 되었겠지’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상상할 수 있는 원리이다. 


짐작과 상상 사이에는 소리가 존재하고 인간의 상상력이 존재한다. 독자분들께서도 상상력의 눈으로 짐작과 상상 사이에 존재하는 필자의 이야기를 따라가길 바란다. 



투즈귈에서 출발하여 1시간 30분을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만 보고 달렸다. 어쩜 이리도 아무것도 없이 오직 하늘과 땅만 있을까?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원근감 없는 비현실적 풍경이었다. 더러더러 보이던 구릉지마저 자취를 감춘 광활한 평야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온전히 하늘과 땅 만으로 이루어진 풍경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시간 개념은 이미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로 떠난 지 오래전이었다. 하늘과 땅만 보이는 광활한 공간엔 시간이란 개념이 느껴지지 않았다. 태초에 창조된 하늘과 땅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땅이 공허하였다는, 물에서 드러난 뭍을 땅이라 하였다는 창세기 기록까지 떠오른 풍경이었다. 생명이 번성하는 이 땅의 풍경은 태초의 천지창조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은 땅이라 생각되었다. 창세기까지 올라갔으니 올라가도 너무 많이 올라간 셈이었고, 고삐가 풀리긴 그의 상상력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초현실적인 영원의 순간으로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푸릇푸릇한 초록으로 얕게 덮인 들판 끝에 머문 희붐한 안개가 흐릿하게 보이는 먼 산마저 보일 듯 말 듯 감싸 안아 마치 꿈속에 빠져든 듯한 몽환적인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안개 뒤로 숨은 하늘도 그저 옅은 푸른색으로 낮게 내려앉았다. 띄엄띄엄 황토빛깔 속살을 드러낸 대지위로 미끈한 도로가 이어지는 평원을 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달리고 있었다. 하나 둘 집이 보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사는 악사라이 시가지가 가까워지며 비로소 현실세계로 다시 돌아온 그였다. 


시내로 들어가면서 본 마을풍경도 평야지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층빌딩과 아파트로 채워진 도심에선 절대 볼 수 없는 태초에나 있을 법한 파란 하늘은 악사라이 평원에 있었고, 그저 높아야 3~5층 정도의 주택이 들어선 마을에도 있었다. 시야를 가리지 않는 악사라이 시내는 어딜 가나 똑같은 아파트 빌딩 숲으로 채워진 우리와는 사뭇 다른 스카이 라인을 볼 수 있는 도시의 풍경이었다. 나지막하게 지어진 집들이 파란 하늘아래 옹기종기, 더러는 띄엄띄엄 모여 있었다. 적당히 띄엄띄엄 비워진 공간에 채워진 파란 하늘이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마을 풍경은 그리 예민하지 못한 그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모자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빌딩 숲이 가득한 도심의 풍경을 보다 보면 상실감마저 느껴지는 우리나라의 그렇고 그런 도시의 풍경과 달리, 덜 채워진 것 같은 뭔가 모자란 것 같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충만함이 느껴지는, 상실감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그렇게 대비되는 풍경을 보며 도시의 공간을 상실감이란 주제로 재해석하고 있는 아들 녀석의 작품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https://www.joyunguk.com/exhibitions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극심한 도심 공해나 미세먼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마을은 평화스러웠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그저 모든 것을 신께 의지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인샬라의 나라답게 급박하거나 긴장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사는 모습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었다. 행복도가 경제성장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곳의 사람들은 물가상승과 엄청난 인플레에도 불구하고 그리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매년 OECD에서 발표하는 ‘세계행복순위’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2023년 3월에 발표한 세계행복순위 보고서에서도 한국은 38개국 중 35위에 머물렀다. 삶의 만족도 측면에서 튀르키예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27위보다 몇 계단 아래인 31위였는데, 오히려 OECD에서 작성한 이 기록이 무색할 정도로 평온했고 온화한 미소가 가득하였다. 


인샬라의 나라여서일까?


지수는 지수일뿐, 개인의 삶을 지수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지 싶었다. 이들이 살아가는 힘의 원천엔 ‘인샬라’가 깃들어 있는 듯했다. 인샬라(아랍어: ان شاء الله)는 '알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뜻이 담겨있는 종교적인 용어이지만 이네들은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우리의 인식으로 ‘예’, ‘아니요’로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이네들의 말이다. 


튀르키예 조상들은 과거 초원을 떠돌며 생활했던 유목민이었다. 유목민은 상대방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사말로 표현한다. 사람을 들판에서 만나면 인사부터 건네는 것이 유목민의 문화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을 만나면 악수를 청하며 서로 손을 잡고 흔들며 인사한다. 경우에 따라서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고 왼손으론 상대방의 어깨를 감싸 안기도 한다. 독자들도 흔히 보는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그가 튀르키예를 여행하며 시장이나 거리, 공원에서 본 풍경이기도 하다. 이네들이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 대부분 그 자리에 서서, 또는 난간이나 돌 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렇게 악수를 청하고 서로 가볍게 포옹하며 담소를 나누는 문화는 유목민들의 관습이다. 유목생활은 늘 들판을 오가며 사는 외로운 삶이고 낯선 사람들과 부딪치는 삶이다. 이때 상대방에게 적대적이 않음을 표현하는 것이 인사말이고 악수였고 가벼운 포옹이었다.  


지난 이야기에서 언급했듯이 튀르키예 사람들은 투르크족이다. 우리에겐 돌궐족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돌궐족은 과거 몽골 북방의 강자였고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이다. 만나면 인사부터 건네고 악수를 청하는 이들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오며 선택한 이슬람교엔 ‘인샬라’가 있었다. 


코란 18장 23~24절 기록엔, 

“분명 내가 내일 그것을 행하리라 말하지 말며(23), 하나님의 뜻이라 하되 그대 가 잊었을 때는 주님을 염원하라 내가 바라보니 나의 주님께서 이 것보다 더 가까이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이라 말하라(24)” 


이 구절은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라고 인샬라를 가르치는 구절이다. 이네들이 말하는 인샬라의 근거가 되는 기록이다. 코란의 이 가르침은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모든 일은 신이 주관하며 신의 뜻이 따라야 가능하다 믿는 이슬람교 믿음의 근간이다. 


비록 엊그제 이스탄불에서 시작한 여행이지만,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이지 싶었던 ‘인샬라’는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들의 특별한 문화였다. 이교도의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섣불리 ‘예, 아니요’의 문제로 인식하기보단, 이네들의 특별한 세계관으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유익하지 싶었다. 앞으로 남은 튀르키예 일정 내내 이네들처럼 ‘인샬라’의 마음가짐으로 여행을 한다면, 그의 튀르키예 여행은 어떤 여행보다 행복한 여행이 되지 싶었다. 


“인샬라! 카파도키아”

라고 말하며 튀르키예 여행을 이어가는 그의 앞길에 왠지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았다.


악사라이는 중앙 아나톨리아의 중심도시로, 튀르키예의 중부에 위치한 악사라이 주(州)의 주도이다. 인구 약 35만 명의 도시로 면적은 4589㎢로 제주도 면적(1849㎢)의 약 2.5배 크기의 도시다. Ak은 흰색, Saray는 궁전을 뜻하는 말로 Aksaray는 ‘하얀 궁전’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튀르키예 중부의 교통 요지인 악사라이는 과거 실크로드 무역의 중계지로 번영을 구가했던 무역 도시였고, 시리아 방면으로 진출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도시이다. 고대에는 가르사우라 Garsaura로 불렸으며, 카파도키아 왕국 시대엔 마지막 왕 아르켈라우스 이름에서 유래된 아르켈라이스(Ἀρχελαΐς)로, 이후 로마 제국 시대엔 콜로니아 (Κολώνεια, Colonia)라는 이름으로 지명이 여러 번 변경될 만큼 어느 시대 때나 중요한 거점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1071년 셀주크 투르크, 1470년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악사라이는 여전히 교통 요지이다. 악사라이를 경유하여 동북쪽으로 카파도키아, 서남쪽으로 콘야로 이어진다. 중앙 아나톨리아의 남북을 종단하는 O-21번 고속도로는 북쪽의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와 남쪽 동지중해 연안의 도시 메르신 Mersin과 아다나 Adana로 이어지고, 튀르키예 동부 시리아 접경지역인 가지안테프 Gaziantep와 샨리우르파 Şanlıurfa로 이어지는 교통 허브인 도시다. 


악사라이엔 1236년에 세워져 27도 기울어져 '터키 피사의 사탑'으로 불리는 에으리 미나렛 Eğri Minare, 1229년 카이쿠바드 1세가 건설하고 1278년 중수된 중세 카라반사라이의 전형을 볼 수 있는 술탄 한 카라반사라이, 초기 기독교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크즐 켈리세(붉은 교회)와 찬르 킬리세 (종 교회) 등 수많은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는 도시이다. 특히 악사라이 동남쪽 20km 지점에는 고대 비잔티움 시대에 벌집 모양으로 뚫린 동굴들이 지하 거주지와 암굴 교회로 활용된 기독교 성지 으흘라라 Ihlara협곡이 있는 카파도키아 여행의 시작점인 도시이다.


여행은 어떤 곳을 가느냐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곳에 대한 생각과 편견을 어떻게 바꾸느냐의 문제이지 싶다. 여행지는 대개 광활한 자연, 역사유적과 도시, 다양한 문화, 액티비티 한 모험과 레저스포츠, 특별한 현지음식, 엔터테인먼트 테마파크와 건강 웰빙 휴양지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스탄불 역사지구는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를 비롯한 오벨리스크 등 이네들의 독특한 역사적인 이야기와 다양한 문화가 담긴 도시였다. 그랜드 바자르와 베이파자르는 간접적이나마 이네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여행지였으며, 앙카라는 터키공화국 수립과 과거 히타이트 문명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는 도시였다. 물론 문명의 흔적은 깨지고 흩어진 돌로 남아있지만 말이다. 소금호수 투즈귈과 끝없는 지평선이 이어지는 악사라이 평야지대는 튀르키예의 다채롭고 광활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본 이러한 여행지는 튀르키예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으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뿌리내린 이슬람 종교의 안식처와 같은 곳이었다.


그가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는 것은 수년 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며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다녀온 모로코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때 다녀와 썼던 여행기도 다시 퇴고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고 얼마 전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에세이도 구상 중이다. 퇴고가 마무리되는 대로 독자들과 공유할 예정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나는 주요 사건 사고 이야기를 뉴스매체를 통하여 보고 듣는다. 그도 다르지 않았다.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폭력적인 사건과 사고를 접하면서 사실상 이슬람 세계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보다는 다소 왜곡되고 부정적인 면이 더 각인되어 있지 않았나 싶다. 물론 여행이 끝난 후 이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우리네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튀르키예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일상을 보며 이슬람 세계에 관한 그의 편견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지평선만 끝없이 이어지던 투즈귈이 있는 알투글라 Altuğlar와는 달리 카파도키아 네브세히르 Nevşehir에 들어서자 완전히 다른 지형이 펼쳐진다. 그렇다고 높은 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언덕을 형성한 구릉지가 보이며 언어로 표현하기엔 한계가 느껴지는 비현실적이고 신비로운 풍경이다. 카파도키아에서 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침식 지형이고 풍화로 빚어진 독특한 풍경이다. 


카파도키아는 아나톨리아반도 중앙의 하산다기 Hasandağı, 귈루다가 Göllüdağ’ın, 에르시예스산 Erciyes Dağı의 화산활동으로 인하여 형성된 독특한 지형이다. 약 3백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화산재가 이 지역 일대에 뿌려져 굳어지며 부드러운 응회암 지질층이 형성된다. 화산재를 뿜어낸 화산은 용암이 분출되며 화산재 위에 덮이고 현무암 층이 쌓이게 된다. 적갈색, 흰색, 주황색의 지층이 겹겹이 쌓여 있는 응회암과 용암층이 세월이 지나며 현무암이 서서히 갈라지고 부서지기도 하며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며 부드러운 응회암은 침식작용이 일어난다. 따듯한 기온과 차가운 기온이 반복되고 바람이 불며 세월에 깎이는 풍화작용이 거듭되며 오늘날 일명 ‘요정굴뚝’이라 부르는 독특하고 경이로운 기암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카파도키아 파노라마를 만들어 낸 것이다. 


요정굴뚝(Fairy Chimneys)이라 부르는 hoodoo는 수백 년 동안 풍화와 침식에 의해 형성된 독특한 암석 기둥을 의미하는 지질학 용어이다. 튀르키예어론 peribacalar라 한다. Hoodoo(암주) 상단에 작은 돌 더미 혹은 돌 판이 있어 마치 요정의 모자를 연상케 하여 ‘요정굴뚝’이라 부르는 지형이다. 카파도키아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요정의 굴뚝 위로 아름다운 풍선들이 가득 떠오르는 풍경은 그들의 튀르키예 여행 중 가장 잊지 못할 카파도키아의 풍경이었다. 


카파도키아는 시 전체가 이런 지형이다. 응회암은 화산이 분화할 때 분출되는 직경 2 mm 이하의 화산재가 굳어져 만들어진 암석으로 부드러운 특성 때문에 가공이 용이하다. 가공된 응회암은 공기와 접촉하며 내구성이 좋은 건축자재가 된다. 이들은 이렇게 가공한 응회암으로 교량도 건설하고 성곽도 축성하며 집 지을 때 건축자재로도 사용한다. 기원전 4세기 초 로마시 주변에 건설된 고대 로마의 방어벽 세르비안 벽(Servian Wall)도 응회암으로 축조한 것이다. 후에 이곳을 여행하며 들렸던 식당이나 벨리댄스를 공연하는 공연장 등 많은 시설들이 응회암 바위에 구멍을 뚫어 파내고 지은 지리적 공간과 통합된 동굴구조임을 보게 된다. 네브세히르는 그러한 지질구조의 언덕에 정착지를 건설한 마을이다. 곳곳의 암석에 비둘기 집처럼 구멍을 뚫어 만든 옛 주거지들을 흔히 볼 수 있는 카파도키아이다.


카파도키아는 기원전 6세기의 고대 페르시아 지배를 받는다. 고대 페르시아의 기록엔 'Katpatuka'로 기록되어 있다. 카파도키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과거 근동의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8세기경 히타이트인들이 살았던 이 땅에는 히타이트, 비잔틴, 셀주크, 오스만 제국이 차례로 들어서며 히타이트 문명과 비잔틴 문명이 이어지고 다양한 문화가 꽃피었던 땅이다. 


카파도키아 왕국은 헬레니즘기에 아리아라테스 1세(기원전 331년)부터 서기 17년 로마 제국의 황제 티베리우스가 마지막 군주 아르켈라오스를 폐위하고 카파도키아를 속주로 삼으며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약 3세기 동안 동부 아나톨리아를 지배하였던 페르시아계 왕국이다. 


헬레니즘 Hellēnismos은 당시 그리스화(化)를 일컫는 고대 그리스어로 근동에서 그리스화 캠페인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를 말한다. 당시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 소아시아, 이집트, 아케메네스 왕조, 그리고 지금의 파키스탄 변경까지 병합하여 미증유의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고대 그리스의 문화의 진정한 최 전성기를 이루며 건설한 제국이라 하여 ‘헬레니즘 제국’이라 한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이 군사 정복으로 이룩한 제국에 의미를 부여하여 ‘알렉산더 제국’이라고도 한다.  


한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카파도키아 왕국의 멸망은 로마의 정치적인 상황과 맞닿아 있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아르켈라오스 왕이 기원전 6년 로도스 섬으로 물러난 티베리우스를 괄시하는 실책 때문이었다. 당시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분명하다 판단한 아르켈라오스의 바람과는 달리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몇 년 뒤 요절해 버렸고, 별 볼일 없다 여겼던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공인되면서 카파도키아 왕국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과거 티베리우스는 아르켈라오스의 죄를 변호하여 무죄를 이끌어 낸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대놓고 자신을 무시했던 티베리우스는 아르켈라오스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의 변호 덕에 살아난 그에게 원한을 품었고, 마침내 서기 17년 티베리우스는 아르켈라오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체포하기에 이른다. 결국 재판도 하기 전에 감옥에서 사망을 한 아르켈라오스와 함께 카파도키아 왕국은 멸망하였고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정치 지도자의 섣부른 판단과 불필요하고 지혜롭지 못한 처신이 불러들인 불행인 셈이었다. 충분히 경계로 삼을만한 일이다. 


후에 로마 제정 초기의 저술가이자 정치가로 아그리콜라(Agricola), 게르마니아(Germania), 역사(Historiae), 연대기(Annals) 등 유명한 역사 저술을 남긴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56?~120?)는 아르켈라오스가 노령으로 인한 병환 또는 자살로 로마에서 죽었다는 기록을 역사서에 남긴다.


아무튼 카파도키아는 로마제국의 기독교 탄압을 피하여 이곳으로 숨어든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데린쿠유 같은 동굴 주거지와 수도사의 골짜기 동굴엔 프레스코화 그림으로 성경이야기를 설명하는 동굴 교회 등이 생겨나며 자연과 역사가 하나로 어우러진 독특한 구조의 피난처이자 안식처가 된다. 


당시 아무리 막강했던 로마군이었다 하더라도 수많은 기암에 파인 벌집 같은 동굴과 지하동굴로 광범위하게 이어진 이곳, 카파도키아로 숨어든 초기 기독교도를 색출해 내는 것은 아마도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였지 싶었다.  


시간은 이미 오후 2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들은 투즈귈에서 약 2시간가량을 이동하여 괴레메 Göreme, 네브셰히르 시내에 당도한다. 괴레메, 네브셰히르는 카이세리 Kayseri, 악사라이, 니데 Niğde와 함께 카파도키아를 여행하는 주요 거점 도시이다. 이 도시를 상징하는 조형물인 듯 보이는, 시내 한복판 로터리에 모습을 드러낸 항아리 물병이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흙으로 빚은 물병 같기도 하고 항아리 같기도 한 조형물의 정체는 ‘항아리케밥’을 만들 때 사용하는 항아리였음을 점심을 먹기 위하여 들린 항아리 케밥 전문식당에서 알게 된다. 그리고 카파도키아 인근의 아바노스 도자기 마을 Avanos Pottery Village에서 생산되는, 그 기원이 히타이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명한 도자기임을 알게 된다. 아바노스 도자기는 이네들의 생활용품부터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공예품으로 크질이르마크 강에서 얻어지는 붉은 흙으로 빚은 도자기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우선 식당을 찾아 나선다. 괴레메 마을 거리에 ‘아리랑’. ‘우리집’ 등 익숙한 한국 식당 간판들이 눈에 띈다. 초승달이 그려진 붉은 튀르키예 국기와 태극기까지 걸려 있는 한국식당들이 즐비한 괴레메 마을 거리를 지나며, 마치 등산과 걷기 여행을 하며 마주하게 되는 국내의 어느 작은 마을 같은 조금은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거리의 상점엔 기념품, 공예품, 도자기 그릇 등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오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배낭을 멘 여행자들은 그렇게 한적한 괴레메 마을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한국사람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관광객이 ‘괴레메 세라믹(Göreme Seramik)과 아리랑 Korean Restaurant’ 간판이 걸려 있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1층은 도자기를 팔고 2층은 한국식당으로 영업을 하는 가게였다. 어느 나라를 여행하든 멀리 외국에 나와서 우리말 간판을 보는 것은 정서적으로 매우 안정감을 주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 해졌다. 이런 작은 순간들 마저도 그들에겐 특별한 순간으로 다가왔다.


괴레메는 작은 마을이다. 인구 약 2000명 정도의 마을로 네브셰히르 지구에 있는 벨데(마을)였다. 벨데 Belde는 시정촌이 있는 마을을 지칭하는 말이다. 많은 암굴교회와 수도원 있는 괴레메는 초기 기독교의 중심지였으며 카파도키아 여행의 중심지 같은 마을이다. 


괴레메(Göreme)라는 마을 이름은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르 Gör와 에미 emi가 합성된 말로 의미는 '이곳을 볼 수 없다'이다로마의 기독교 박해 기간 동안 숨겨진 피난처 역할을 했던 이 지역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다 카파도키아가 관광지구로 지정이 되며 마을이름으로 붙여졌다고 한다


과거엔 농업 정착지였지만 매년 수백만 명이 찾아오는 관광 산업이 번창하며 많은 동굴 주택을 호텔로 개조하였고, 초기 기독교 교회 유산과 열기구 투어 등 카파도키아 파노라마를 여행하는 거점마을이 되었다. 괴레메 국립공원 내에 있는 마을로 이 일대 지역은 1985년 유네스코 세게 문화유산 목록에 추가되었다.   


식당으로 가면서 보는 풍경만으로도 괴레메는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신의 조각품 같은 경이로운 파노라마가 이어지는 카파도키아 풍경이었다. 곳곳에 펼쳐지는 자연이 만들어낸 카파도키아, 인공적인 시설물이 첨가되지 않은 그야말로 순수 그 자체인 카파도키아를 마주하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오후였다.


본격적인 카파도키아 관광에 앞서 항아리 케밥 전문 동굴식당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한다. 응회암이 굳어진 바위에 동굴을 파고 지은 식당은 난생처음 보는 그들이었다. 별 다른 건축자재는 없었고 그저 굴을 파 사람들이 드나드는 출입구를 만들었고 적당한 높이의 천정과 하얀 벽은 응회암 그 자체였다. 있다면 조명기구와 문이 필요한 곳에 설치한 문틀과 문, 그리고 인테리어 소품 정도였다. 벽면과 천장에 굴을 파는 도구로 긁어낸 빗살 무늬 같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원시시대의 토기 파편에 새겨진 무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굴 내부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듯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친환경 집이란 생각을 해본 그였다. 현대건축은 서로 다른 많은 재료를 붙여 나가는 방식으로 지어진다. 당연히 접합제나 보조 자재들이 필요한 방식이다. 그런 현대건축에 비해 동굴 건축은 암석을 팔 수 있는 도구만 있으면 가능한 단순한 방식이어서 시멘트도 철근도 접합제도 보조 자재도 필요 없는,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으며 집을 지을 수 있지 싶었다. 물론 응회암이란 무른 성질의 바위가 집을 지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만큼은 있어야 하는 전제조건이 붙는 일이지만 말이다. 


붓을 꺾고 조선 팔도를 유람했던 매월당이 보았다면 참으로 기뻐할 만한 집이었다. 요즘 사회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풍족한 시대이다. 뭐든 넘쳐난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재화 귀한 것을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세대 간 격차가 매우 큰 사회이다. 후진국에서 선진국 세대까지 동시대에 살고 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사회다. 한강의 기적이 가져온 매우 독특한 사회 구조이다. 재화의 소비에 있어서도 이 격차는 뚜렷할 수밖에 없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남긴 시 ‘생재설(生財說)’ 중 세상만물이 ‘所生財貨百物(소생재화백물)’ 정해진 분량이 있어 ‘各有限劑(각유한제)’ 함부로 쓰면 안 된다 ’不可妄費(불가망비)’라고 절제된 소비를 이야기한 시 구절이 떠오른 괴레메 동굴 식당이다.  


蓋天地(개천지) 대개 하늘과 땅이

所生財貨百物(소생재화백물) 생산하는 모든 재화와 만물은

各有限劑(각유한제) 각기 정해진 분량이 있어

不可妄費(불가망비) 함부로 써버려서는 안 된다네

苟不節用(구불절용) 참으로 아껴 쓰지 않기를

如焚藪獵禽(여분수렵금) 마치 숲에 불을 질러 새를 사냥하듯

竭澤取魚(갈택취어) 못물을 말려 물고기를 마구 잡듯 한다면

坐見窮瘁(좌견궁췌) 결국 삼라만상이 곤궁하게 되어

而莫之贍矣(이막지섬의) 공멸에 이르게 된다네



아무튼 그들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지어진 집을 본 셈이었다. 원철과 민수가 벽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벽을 만져보며 하는 말은 혀를 끌끌 차며 이구동성으로 “야!, 대단하네”였다. 


그랬다. 그가 보기에도 정말 대단했다. 이걸 기계를 동원해서 판 것 같지 않았다. 사람이 곡괭이 같은 도구를 들고 일일이 파낸 것 같았다. 더욱이 예전엔 이렇다 할 기계들이 없던 시대였고, 믿을 것은 오직 인력뿐이었으니 사람들이 개미처럼 일을 해야만 이런 동굴 교회나 주거지를 지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 느껴졌다. 인간의 의지는 생각보다 엄청난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던 동굴 식당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새발의 피’, 鳥足之血을 수천수만 번을 외쳐도 결코 닿을 수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티끌 같은 것이었다. 나중에 그들이 찾았던 괴레메 계곡과 괴레메 야외 박물관(Göreme Açık Hava Müzesi), ‘수도사의 골짜기’, 데린쿠유 지하동굴을 보면서 정말 까무러치게 기절초풍할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항아리 케밥

아무튼 기다리던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식당 직원들이 불이 붙은 항아리를 캐리어에 싣고 들어온다. 시가지에서 봤던 조형물 항아리와 모양이 같은 항아리다. 캐리어엔 붉은 토기 그릇이 함께 실려 있었다. 4명의 직원 중 매니저 급 정도 되어 보이는 직원이 개봉에 앞서 간단히 설명을 한다. 테스티 케밥 testi kebabı 또는 쵬레크 케밥 çömlek kebabı이라 부르는 카파도키아 지역의 전통적인 케밥, 항아리 케밥이다. 항아리에 케밥을 만드는 전통은 히타이트 문명에 기원을 둔 아바노스 마을의 도자기 문화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카파도키아의 방식이라 한다.


튀르키예에서는 오래전부터 사용한 전통적인 물단지를 ‘테스티 testi’라 하였고, 주전자로 쓰인 토기를 쵬레크 çömlek라 한다. 이 물병 같기도 하고 주전자 같기도 한 항아리에 양고기와 양파, 토마토, 당근 등 각종 야채와 마늘, 피망, 후추, 버터 등을 넣고 밀봉하여 화덕에 넣어 약 90여 분을 끓인다고 한다. 


내화장갑을 낀 직원이 손님들 앞으로 가져온 불이 붙은 항아리 뚜껑을 열고 항아리 속에 담긴 케밥을 큰 트레이에 쏟아붓는다. 아바노스 도자기 그릇으로 보이는 붉은 토기에 담아 손님 테이블로 내는 과정을 마치 무슨 쇼처럼 보여주는 네브세히르 항아리 케밥 전문식당 Silene Kaya Restaurant이다. 


Silene Kaya Restaurant은 카파도키아 특유의 암석을 뚫어 식당을 꾸린 동굴 식당이다. 동굴 내부는 믿기지 않을 만큼 넓고 깔끔했다. 동굴을 파 이만한 공간을 얻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야채와 수프, 바게트 같은 빵 에크멕 ekmek이 준비된 테이블에 붉은 토기에 담긴 항아리 케밥을 직원들이 가져오면 상차림이 완료된다. 튀르키예는 호텔이건 일반 식당이건 야채샐러드는 드레싱을 하지 않는다. 이곳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빵은 우리네 빵과는 달리 퍽퍽한 편인 유럽의 바게트 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빵인데, 고추 소스를 곁들여 케밥과 함께 먹으면 제대로 맛을 낸다. 향신료가 과하지 않은 케밥은 여러 가지 야채와 함께 화덕에 끓여서 촉촉한 국물 맛과 함께 부드러운 고기 맛이 한국 사람들도 무난히 먹을 수 있는 풍미이다. 개인적으로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튀르키예의 전통음식을 경험하며 이네들의 미식을 맛볼 수 있는 카파도키아 항아리 케밥은 꼭 드셔보실 것을 추천한다. 비교적 우리네 입맛에 잘 맞는 편이다. 


외국에 나오면 음식 때문에 고생하는 편인 원철과 민수도 항아리 케밥이 입맛에 맞았는지 한 그릇을 뚝딱 비운다. 결과적으로 ‘참, 맛있는’ 항아리 케밥이었다.


이들의 항아리 케밥은 단순한 음식 이상이었다.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동굴 식당에서 크질이르마크 강에서 얻어지는 붉은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 90분을 끓여내고, 다시 불붙은 도자기를 열어 트레이에 담아 손님 상에 내는 모든 과정 자체가 이들의 오랜 역사였고 전통이었으며 문화였다. 그들이 먹은 항아리 케밥은 잊을 수 없는 카파도키아의 향기였다.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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