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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환 May 10. 2024

크질이르마크 강을 따라 걷는 아바노스 마을 산책

여행은 무릎고뱅이 튼튼할 때

 

호텔 방에만 머무르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날씨였다. 겨울날씨 치고 전혀 겨울 같지 않은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이 겨울날, 마치 성급한 봄이 온 것 같았다. 포근하게 느껴지는 미풍이 겨울잠에서 깬듯한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고, 흙냄새가 바람에 실려와 때 이른 봄소식을 전해줄 것만 같았다. 곱슬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묶은 로컬 가이드 마미도 이곳에서 이렇게 따뜻한 겨울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졸가지 끝에 솜털을 뒤집어쓴 목련 꽃망울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그런 날이었다. 미세먼지와 황사로 몸살을 앓는 우리네와는 비교불가의 겨울 하늘이었다. 청명하기까지 한 맑은 하늘을 따라 걷고 싶은 충동은 어쩌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궁즉통窮則通이라 했던가. 때마침 창문을 열었더니 호텔 건물보다 돌출된 로비층의 옥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옥상을 맴돌며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카파도키아 파노라마를 봤다 하늘을 봤다 눈을 어디에도 진득하니 한 곳에 둘 수 없었다. 사람의 욕심이 그랬다. 양손에 떡을 들고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 이래저래 널뛰는 마음을 붙잡고 싶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가는 대로 그저 흘러가고 싶었고 널뛰는 마음에 맡기고 싶었다. 오랜만에 마음도 콩닥거리는 것이니 아주 가끔은 뭐,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방 안에서 창문을 통하여 보는 하늘보다 사방이 탁 트인 옥상에서 보는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호상가호好上加好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금상첨화錦上添花였던 것은 막힘없이 펼쳐지는 카파도키아 파노라마까지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높아야 2층 높이의 로비 층 옥상에서도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이 멀리까지 탁 트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어쩜 이렇게 높은 건물이 없을까? 앞집 거실이 들여다 보이는 구조의 아파트 생활에 찌든 사람들에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갑자기 딴 세상으로 온 느낌이었다. 실로 혼자 보기 아까운 하늘과 카파도키아 파노라마였다. 


그래서 튀르키예로 온 후 처음으로 영상통화를 연결하여 손주들과 함께 카파도키아 하늘과 풍경을 보며 통화를 했다. 전화기 속에서 건너온 아이들 목소리가 카파도키아 하늘로 마구마구 흩어졌다. 감탄을 연발하는 둘째 손녀와 막둥이 녀석까지 핸드폰 화면 밖으로 비집고 나올 기세였다. 




큰 손주 녀석은 터키 아이스크림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이니 아이스크림 얘기는 당연하지 싶었는데. “아이스크림으로 엄청 장난질을 한다는데…”,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 달라 한다. 아이스크림으로 장난질을 해? 아이스크림 동영상을 찍어 달라? 이건 또 무슨 손주 녀석 다운 황당한 주문인가? 평소 예기치 못한 음식 이야기를 곧잘 하는 큰 녀석, 얼마 전 마늘 맛이 나는 치킨을 먹으며 '곰이 사람 되는 맛'이라며 얘기했던, 맛에 대해 특별한 감각을 갖고 있는 아이였다. 여덟 살이 되던 해 겨울에 피자 만들기 체험을 한 후 열두 가지의 재료를 나열한 후 열세 번째 피자 재료를 ‘마음’이라 써서 그에게 보여주었던 큰 손주 녀석의 주문은 뭘 사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터키 아이스크림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암튼 알았다고 대답하고 통화를 마쳤다. 먹는 음식인데… 아이스크림으로 장난질을? 통화를 끊고 나서 잠시 의문을 가져봤지만 뭔 이야기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암튼 다니면서 터키 아이스크림을 눈여겨봐야 하지 싶었다. 


그랬다. 이때까지 만해도 전화기 너머 손주 녀석 얘기가 뭔 이야기인지 몰랐다. ‘장난질 엄청 한다는데…’라고 말한 손주의 말을 나중에 쉬린제(Şirince) 마을에서 정확하게 이해한 그였다. 이때까지 만해도 그의 튀르키예 여행 과목에 터키식 아이스크림은 물론 돈두르마라는 단어 자체가 전혀 없었기에 ‘장난질한다’라고 말하는 손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그였다. 


아무튼 손주의 이해할 수 없는 주문 덕에 터키식 아이스크림에 관심을 가졌고, 그의 튀르키예 여행과목에 돈두르마가 추가되었다. 다음 날 우치사르에서 터키식 아이스크림을 처음으로 접하였지만 손주가 말했던 장난질은 볼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카메라를 동영상모드로 놓고 아이스크림 상인에게 들이대고 한참을 지켜보았지만 특별히 장난질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니 돈두르마 상인의 쇠막대기도 장난질을 할 틈이 없었고, 손님의 주문에 따라 바닐라, 레몬, 초코맛 아이스크림통을 탕탕 처대며 오가기 바빴다. 그리고 며칠 후 쉬린제 마을에서 돈두르마 상인의 장난질에 유쾌하게 당하며 손주 녀석이 얘기하던 ‘장난질’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덤으로 돈두르마 상인의 장난질을 동영상으로 남겨 손주에게 보내주었으니 손주가 준 미션을 훌륭하게 클리어한 셈이었다.  


텅 빈 야외 수영장 수면으로 쪽빛 하늘과 정원 상록수가 함께 드리워지며 눈이 시리도록 푸른 카파도키아 하늘을 담아내고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19시로 예정되어 있으니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는 셈이었고, 우치사르에서 호텔로 들어와 친구들과 함께 플라스틱 병에 담긴 ‘처음처럼’으로 잠시 우정도 한 잔 기울였으니 더 이상 방에 머물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의 쌀쌀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포근하고 따뜻한 날씨였다. 무엇보다도 가을 하늘처럼 청명한 하늘이 손짓을 하며 “뭐 하고 있어, 어서 나와 봐”라며 그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랬다. 그날 카파도키아 하늘은 우리나라에선 맑은 가을날에나 볼 수 있는 쪽빛 하늘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쪽배라도 띄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바람이 되어 하늘에 띄운 쪽배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늘 저녁엔 벨리댄스 관람이 예정되어 있었고, 내일은 이른 새벽부터 카파도키아 열기구 투어가 예약되어 있었다. 오늘 저녁 일정과 내일 새벽에 출발하는 열기구투어 일정을 감안하여 오후 일정을 잡지 않고 일찍 호텔로 들어왔지만, 이런 멋진 순간을 호텔방에서 맞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작은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에 이끌리듯 홀연히 문을 열고 나서는 그들이었다. 어스름하게 붉어지는 하늘 끝자락이 마을로 내려앉고 있었다. 평소에도 낮 빛이 붉은 원철의 얼굴을 닮은 하늘 끝자락을 따라 걸었다. 해가 늦게 지는 지중해 연안의 땅답게 오후 5시 20분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어둠은 내리지 않았고, 저편 하늘 끝으로 엷은 연분홍 노을빛만 물들기 시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도를 열어 주변 지역을 살펴보았다. 가까운 거리에 마을을 관통하는 한 줄기 강이 보였다. 소금호수, 투즈귈에서부터 보았던 크질이르마크 강이었다. 유역의 길이가 무려 1,355㎞(842 마일)에 이르는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강으로, 시바스Sivas 동쪽 산지에서 발원하여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 남서쪽으로 흐르다 북동쪽으로 굽어 흑해연안의 중심도시 삼순주(Samsun ili )의 바프라Bafra만 삼각주를 형성하고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과거 히타이트 시대 때는 마라사티야Maraššantiya 강이라 했고, 지금은 ‘붉은 강’이란 뜻의 크질이르마크 강(Kızılırmak Nehri)이라 한다. 삼순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1919년 5월 19일 터키 독립전쟁을 시작한 곳으로 오늘날 터키공화국 수립의 근간이 되는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도시다. 강변까지 걸어갔다 오면 어느 정도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호텔에서 5분가량을 걸어 나와 천천히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걸었다. 4차선 도로에는 따로 인도가 없었고, 도로 한가운데에는 졸가리만 남은 가로수들이 노란색 중앙선을 일찌감치 밀어내고 붉은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 끝자락으로 이어졌다. 규정속도는 50㎞/h였고 갓길은 차량 한 대가 넉넉하게 통과할 정도로 넓었다. 교통량이 많거나 혼잡한 도로는 아니었다. 이따금씩 지나다니는 차량들은 대체적으로 규정 속도를 준수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낯선 땅의 교통문화를 알 수 없었던 터라 갓길로 바짝 붙어 걸었다. 원철이 앞장섰다.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민수가 뒤를 따랐다. 


그렇게 스적스적, 카이세리(Kayseri)와 네브셰히르(Nevşehir)를 연결하는 D-300번 도로상에서 카이세리 방향으로 걸었다. 원형 교차로로 진입하는 차량들이 로터리에서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일 수 있도록 아스팔트 포장은 블록 포장으로 바뀌었다. 얼마 걷지 않아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보았던 물병같이 생긴 붉은 항아리 조형물이 세워진 로터리에 당도했다. 아바노스 도자기마을(Avanos Çömlekçilik Köyü, Avanos Pottery Village)을 상징하는, 항아리 케밥 만들 때 사용하는 항아리 조형물(Testi Heykeli)이다.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상태로 세워진 항아리였고 조금 떨어진 곳에 항아리에서 떨어지는 물을 담을 수 있는 붉은 그릇이 함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여름철에는 항아리 옆으로 튀어나온 주둥이에서 물이 쏟아지는 분수로도 활용하는 조형물인 듯했다. 


항아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언가 담아두는 물건이다. 물을 담으면 물 항아리가 되고 금을 담아 보관하면 금단지가 되는 그런 물건이다. 인간의 생각을 담아둔다면 사유의 항아리가 될 수 있지 싶었다. 필요할 때 항아리에서 주둥이로 졸졸 흘러나오는 물처럼 담아두었던 생각이 자유스럽게 흘러나와 글이 되는 항아리 하나쯤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 그였다. 아바노스 상징 조형물인 붉은 항아리 앞에서 사진을 한 장 남기고 다시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 로터리에서 우측은 괴레메로 이어지고 왼쪽으로 들어서면 아바노스 마을이 이어진다. 멀리서도 초승달이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튀르키예 국기가 마을 한가운데 봉긋하게 솟은 언덕에 하늘 높이 게양되어 있었다. 조금은 생경하고 낯선 풍경이었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걸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한적하고 복잡하지 않은 마을이었다. 아스콘으로 포장하지 않고 블록을 깔아 포장한 주택가 도로는 넓은 편이었다. 베이파자르에서 보았던 주택가 도로와 같은 형태였다. 우둘두둘한 노면 때문에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는 구조의 도로였다. 주택가 도로와 택지가 비교적 반듯하게 구획정리 된 것으로 보아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은 새롭게 조성된 신시가지인 듯했다.


구획정리가 된 택지에는 단층, 높아야 이삼 층 정도의 주택이 대부분이었다. 거의 대부분 울타리가 높지 않았다. 높아봐야 어른 키로 허리쯤 높이의 철제 울타리였고 마당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구조였다. 앞마당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어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가는 구조였다. 그가 갖고 있던 이슬람 사람들의 일반적인 주택 양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슬람 사람들의 주택은 집안을 들여다볼 수 없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중정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방들이 이어지며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구조였던 것이 그가 알고 있던 이슬람 주거 문화의 특징이었는데, 이 마을의 주택은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구조였다. 이것도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개혁의 결과인가 싶었다.


그저 한적하기만 한 아바노스 마을 풍경은 없던 여유도 생길 것만 같았다. 하늘을 찌를 기세로 게양된 붉은 국기만 빼면 그저 평범한 마을 풍경이었음에도 왠지 호기심이 생기는 마을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두런두런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걸었다. 그러다 건강 이야기가 나왔고 여행이야기가 나왔다. 그들은 이미 모든 대화의 끝에 건강이란 화제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나이였다. 그렇다고 이미란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처럼 ‘벌써’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자조적인 이야긴 아니었다. 그저 세월 따라 살다 보니 어느새 초로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자신들의 건강을 잘 챙기자는 다소 의욕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걷고 있는 중이었다. 더욱이 여행은 두 다리 튼튼해야 가능한 일이기에 어쩌면 자연스럽게 나온 주제였지 싶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주된 화제가 연금과 건강 얘기가 대세다. 때론 서글퍼지는 대화 주제지만 어찌하랴,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순리 아니겠는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말 중에 여행은 무릎고뱅이 튼튼할 때 가라고 한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여행을 다니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말이다. 젊은 사람에겐 맞는 해석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할 것이 많아지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들에겐 이미 ‘한 살이라도 젊을 때’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젊음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 입장에서 이 말의 의미는 스스로 힘으로 걷고 서고 다닐 수 있을 때 열심히 다니자는 다짐 같은 의지를 북돋아 주는 의미와 더 가까웠다. 거센 파도와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배처럼 결연한 의지까지는 아니어도 그저 어둠을 뚫고 태양이 늘 떠오르는 것처럼 자연의 순리에 따라 희망을 갖자는 다짐에 가까운 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늘 녹록지 않은 것이기에, 바삭한 이론은 버석한 현실에 늘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을 공감하는 그들이었다.  


무릎고뱅이는 무르팍의 방언이다. 무릎은 인체에서 가장 큰 관절이며, 굽히고, 펴고, 회전하는 다리의 움직임과 체중 지지와 균형 유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다행히도 그들 모두 아직은 걸을만한 무르팍이었다. 뿐만 아니라 민수는 20년 넘게 테니스로 단련된 몸이었고, 원철은 철각이라 할 정도로 튼튼한 다리를 갖고 있었다. 가끔은 버석한 현실을 옆으로 살짝 미루어 두고 바삭한 이론대로 움직일만한 다리였다.


인류 조상은 끊임없이 걸으며 생활했다. 걷는 것은 생명과 직결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동작이었다. 걸으며 살았고 살기 위해 걸어야 했던 인류 조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튼튼한 다리였다.  말을 길들여 타고 다닌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기에 인류 조상에게는 튼튼한 두 다리가 생명과 직결되는 조건이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인류가 말을 사육한 것은 약 5500년 전부터였고, 기원전 2000년경부터 수레를 끄는 축력으로 이용되었으며, 기원전 1500년경에 이르러서는 승마용으로 애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원전 1500년 무렵 아나톨리아 반도의 히타이트 인들은 철 정제법을 발명하여 철기문명을 꽃피운 시기였고, 이집트는 신왕국 시대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여러 도시국가가 번성하는 지역으로 앗시리아Assyria가 부상하였으며, 바빌로니아 제국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한반도에는 고조선, 부여, 옥저, 진한, 변한, 마한, 동예 등 다양한 부족들이 각자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던 단일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어쩌면 사람들은 늘 유목민처럼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고 싶은 본성을 생득적으로 갖고 있는지 모른다. 인간은 안정된 삶 속에서도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새로운 경험과 세상 탐험에 대한 욕망을 키워 나가는 존재이지 싶다. 이는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고 세상을 탐험하고 싶은 인간 특유의 욕망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한계를 뛰어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인간의 욕구와 연결되어 있는 원초적인 본능 같은 것이다. 이곳으로 떠나온 그만 보더라도 왜 와야 했을까? 왜 튀르키예였을까? 란 물음에 앞서 그저 어디든 떠나고 싶었던, 욕구와 본능 사이의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는 그의 감성에 따라 움직였으니 과히 틀리지 않은 말이라 할 수 있지 싶다.


떠나는 이유는 개인마다 각양각색으로 모두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싶어 떠나고, 어떤 이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근사한 인연이 생기는 것을 은근 기대하며 떠난다. 어떤 이는 자신의 꿈을 좇아 떠나고, 어떤 이는 단순히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 떠난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각양각색의 모든 이유에 어느 정도 낭만 한 숟가락씩 얹어 떠나는 것은 대부분 공감하는 공통적인 사항이지 싶다.


인류는 태초이래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아왔다. 사냥터와 초지를 따라, 더 나은 삶과 희망을 찾아, 새로운 경험을 갈구하며, 낯선 땅을 찾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넓은 초원을 따라 먹이를 찾아 이동했던 유목민의 삶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 할 수 있는 것처럼, 이동의 DNA는 혈관 속에 깊숙이 스며든 원초적인 욕망이었고 인간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본능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본능을 타고난다고 하여도 과히 틀리지 않은 설명이지 싶다.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를 꾀하는 존재이며, 익숙한 환경에 안주하기보다는 새로운 곳을 향한 호기심과 설렘에 늘 이끌리는 경향을 보이는 동물이 인간이니 말이다. 


떠나는 행위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스스로를 알아가는 여정이며, 세상과의 연결을 더욱 강화하는 과정이다. 떠나는 행위에서 얻어지는 새로운 경험은 인간을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며, 스스로 가능성을 펼쳐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성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는 궁극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현대 사회에 와서도 이러한 이동 본능은 여전히 우리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도시로 떠나는 청년, 더 나은 삶을 위해 다른 나라로 이민하는 사람들,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고 싶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이 모두는 인간의 이동 본능이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늘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고, 낯선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인류문명의 역사는 그렇게 여행에서 시작되었고 발전을 거듭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인류가 걸었던 이 땅의 모든 곳에는 인류의 족적이 지문처럼 그대로 남아있다. 땅이름에도 남아있고 인류문화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일찍이 1215년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는 잉글랜드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서였다. 마그나 카르타 제61조에서 "누구든지 왕의 합법적인 허락 없이는 자신의 재산이나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이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는 최초의 법적 조항으로 평가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잉글랜드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문서였기에 실제로 거주이전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최초의 법으로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실제로 거주이전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제정된 프랑스 인권선언문은 제1조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 그들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해야 한다"라고 규정했다. 또한 제13조에서 "모든 국민은 … 거주와 이전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했다. 이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명시한 최초의 법률이다.


이후 미국 헌법, 대한민국 헌법 등 여러 나라의 헌법에서 거주이전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마그나 카르타나 프랑스 인권선언문, 여러 나라의 헌법에 보장된 거주이전의 자유는 다름 아닌 인간이 생득적으로 타고난 유목민 같은 본능을 보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일이다. 역으로 인간에게 가장 큰 형벌은 이동을 제한하는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죄수를 가두어 두는 감옥은 이러한 인간의 본능을 제한하는 형벌인 셈이다.   


아무튼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에서 걷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걷지 못하면 건강에 이상이 오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차츰차츰 병약해지고 침대에 누워있다 인생 끝나버리는 것이다. 삶의 질은 그날로 구깃구깃 구겨져 한쪽에 처박히고 소각장으로 가는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동복지가 잘 되어있는 사회는 조금 다른 문제 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측면에서 제한되고 제약이 따라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한적한 마을을 여유 있게 걸으며 ‘여행은 무릎고뱅이 튼튼할 때 가라고’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주고받다 이구동성으로 나온 걸을 수 있는 건강의 중요성이었고, 걸어야만 하는 본능적인 이유까지 들먹이며 찾아낸 당위성이었다. 고로 ‘걸을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다니자’는 말이었다.



D-300번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카파도키아로(路, Kapadokya Cd.)를 따라 30여분 정도 걸어 고만고만한 주택가를 벗어나니 도자기 제조업체(Hicarono Cetamic), 유기농 식품 판매점, 슈퍼마켓, 보석 상점, 사무실, 항아리 케밥 식당, 백화점(Cappadocia Mall), 아바노스 시장(Avanos Antika Pazarı), 스타벅스, 아파트형 호텔, 경찰서(Avanos İlçe Jandarma Komutanlığı), 버스 터미널(Terminal Parkı), 미술관(Güray Müze) 등 높아야 2~3층인 건물과 도시기반 시설이 이어지는 시가지는 규모만 작을 뿐이지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거리였다. 


인구기준으로 2만 명이 못 되는 우리나라 작은 군 정도의 마을로 보면 맞을 것 같았다. 고층 빌딩의 그림자가 무겁게 내려앉으며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지 않아 좋았고, 무엇보다 각종광고판으로 시선이 어지럽지 않아 좋았다. 토지를 넓게 사용하고 있어서인지 과밀로 복잡하게 얽힌 우리네 도심의 피곤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쾌적한 환경의 마을이었다. 거기다 차량 통행 또한 많지 않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 도로를 끼고 걸어도 크게 매연과 기름냄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산책 삼아 걷기엔 그만이지 싶은 마을이었다. 주택가 거리엔 İğdeli Parkı, Ihlamur Parkı 등 지도상으로 봐도 몇 개의 공원이 곳곳에 조성되어 있었고, 공원과 야외 정원을 이용하여 결혼식 등 리셉션 행사가 가능한 알틴야지 히든 가든(Altınyazı Saklı Bahçe), 아바노스 미술 직업학교(Nevşehir Üniversitesi Avanos Myo)와 학생 기숙사(Avanos Saray Ortaöğretim Erkek Öğrenci Yurdu)등 교육시설까지 갖추어진 쾌적한 마을이었다. 


그가 오랜 세월 살아온 과거 춘천이란 도시와 어딘가 모르게 정서적으로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도시였다. 40~50년 전 춘천은 대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어찌 보면 어정쩡한 도시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어린 시절 추억이, 시골 농촌에서 자랐거나 큰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친구들에 비해 어정쩡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손바닥 만한 원도심 지역이 전부였던 춘천은 조금만 시내에서 벗어나면 농촌 시골이었던 지방 소도시였다. 그런 사정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단지, 과거에 비해 새로운 주거형태인 아파트 개발로 원도심을 벗어나 도심 외곽에 택지가 개발되며 고층빌딩과 고층아파트로 채워졌고, 차량이 증가하고 도심이 넓어진 만큼 도로가 상당히 확충된 점이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일어난 시기와 맞물려 있었고, 그 이후 더 가속화된 경향이 뚜렷했다. 도시기반 시설은 비약적으로 확충되었고 주거시설이 현대화되면서 생활의 편리성이 상당히 개선되는 효과가 있었지만, 반대로 과거에 비해 매우 복잡하고 혼잡 해져 일정 부분 편리성을 상쇄시키는 비기대효과 또한 안고 있는 다소 어정쩡한 도시가 되었다. 어린 시절 정서적으로 느꼈던 춘천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진 도시화된 춘천이 문득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다. 


아무튼, 그들의 눈으로 들어온 아바노스 마을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어 보였고, 도시의 피로도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과밀과 혼잡이란 단어와 거리가 먼 마을처럼 비추어졌다.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건물 앞에 도자기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카파도키아를 상징하는 요정 굴뚝에 포도나무와 포도송이를 덧붙이고 항아리를 얹은 아바노스 마을다운 도자기 조형물로 장식된 건물은 크지도 않고 특별히 미려하지도 않은 일반적인 건물인데, 벽에 새겨진 상호는 ‘Mihran Sultan Cappadocia’ 호텔 건물이었다. 도자기로 상징되는 아바노스 마을임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거리였다. 


시야를 조금 옮겨보니 하얀 벽에 알록달록 예쁜 장식으로 여행자의 눈길을 끄는 상점이 보였다. 예쁜 것을 보면 자연히 눈길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멀리서 얼핏 보니 무슨 선물가게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나서야 도자기를 파는 상점임을 알 수 있었다. 일반 주택처럼 그저 소박한 건물에 상점을 낸 듯했다. 항아리부터 생활에 필요한 접시까지 각양각색의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었고, 우치사르에서 보았던 것처럼 나무에도 물병 같은 항아리 도자기가 대추 열리듯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건물 외벽에 알록달록한 것은 접시 형태의 도자기와 유약을 입히지 않은 붉은색 항아리였고, 빨강 파랑으로 색을 입힌, 가마에 굽기 전 단계의 도자기로 장식된 가게였다. 아마도 도자기 공방임을 알리기 위해 사용된 듯했다. 아바노스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이채로운 풍경이었다. 


그는 이곳 아바노스 마을뿐만 아니라, 후에 데린쿠유 동굴도시와 야외박물관 등 카파도키아와 인근지역을 여행하며 항아리 형태의 도자기를 곳곳에서 보며, 아바노스 도자기는 예나 지금이나 실생활과 밀접하게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공예품임을 알 수 있었다.


아바노스 도자기는 7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전통 공예로, 크질이르마크강에서 얻은 붉은 점토를 사용하여 다양한 색상과 이슬람 문화권의 특유의 문양과 패턴으로 장식되는 것이 특징적인 도자기이다. 대개 손으로 빚는데, 요즘은 전동화된 물레를 이용하여 만들어지기도 한다.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 볼 수 있는 공방이 늘어나며 체험형 관광도 활성화되어 있는 아바노스 도자기 마을이다.  


낯설긴 하지만 포근하게 느껴지는 마을의 거리를 걸어 강변까지 걸어 내려왔다. 마을 중심가로 들어왔음에도 크게 높은 빌딩도 없었고, 건물이 밀집되어 있지 않았으며 빈 땅도 더러더러 보였다. 요리보고 저리 보고 어떻게 보더라도 그저 한적하게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한적한 마을 풍경은 비교적 여유공간이 넉넉했다. 땅이 넓은 나라이기에 크게 이상할 것 없는, 여백이 있는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 


튀르키예 땅은 도시나 농촌이나 여유가 있어 보여 좋았다. 버스를 타고 앙카라에서 이곳까지 오며 보았던 들판에도 휴경지가 많이 보였던 것을 떠올린 그는 한편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1년씩 땅을 놀리며 농사를 짓는 나라, 그 자체로도 여유를 느낄 수 있는 땅, 튀르키예를 여행하며 가장 부러운 것 중 하나였다. 한 해 동안 묵혔던 땅은 자연히 땅심이 좋아 비료를 크게 쓰지 않아도 농사가 잘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요즘 많이들 얘기하는 유기농이 따로 없지 싶었다. 거기다 기후까지 따듯하니… 도대체 부족한 게 없는 땅이었고 두말할 필요 없지 싶은 나라였다. 


그렇게 이곳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거리를 걸어 크질이르마크 강을 건너는 아바노스 다리에 당도했다. 강 건너 언덕 기슭에 붉은 초승달 깃발이 하늘을 찌를 듯 유난히 높게 게양되어 있었다. 마을 높은 곳뿐만 아니라 시장거리와 가게, 심지어는 버스까지 붉은 국기를 걸어두는 것은 튀르키예를 여행하며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왜 저렇게 마을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국기를 게양하는지 상당히 궁금해졌다. 모스크의 첨탑 또한 붉은 깃발 못지않게 마을마다 솟아 있었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 하는 성격인지라 가이드와 로컬가이드, 그리고 틈틈이 이곳저곳에서 귀동냥한 결과에 따르면, 튀르키예 국민의 강한 국가주의, 케말 아타튀르크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 국가 행사에 대한 경의, 그리고 일상생활 속 애국심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로 국기를 곳곳에 게양하고 걸어 놓은 것이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유별난, 또는 남다른 애국심’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는데, 튀르키예 국기는 빨간색 바탕에 하얀색 초승달과 별이 그려져 있다. 빨간색은 순교자의 피를, 초승달과 별은 이슬람교를 상징한다. 튀르키예 국민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이다. 종교적인 의미가 담긴 국기를 게양하는 것은 종교적 신앙심을 표현하는 방식이었고 상징적인 행위였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작은 골목들이 봉긋한 언덕 기슭에 빽빽이 들어선 주택가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아바노스 마을의 중심가이고, 히타이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바노스 마을의 도자기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담긴 구시가지인 듯했다. 


다리 입구엔 대형차량 진입을 차단하는 차량 통과 높이 제한봉이 설치되어 있었다. 차량 높이를 제한하는 차단봉은 사실 오래된 다리가 받을 하중을 줄여주기 위해 통행하는 차량의 중량을 제한하기 위한 시설이다. 따라서 새로 놓은 교량에 설치되는 시설이 아니다. 여행자들이 서로 어깨를 비껴가며 좁은 인도를 따라 오가고 있었다. 보행자들이 다리를 건널 때 좌측 인도를 이용하도록 좌측통행과 우측통행금지 표지판이 각각 설치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은 양쪽 인도로 모두 오가고 있었다. 외국인 여행자로 보이는 체격이 큰 사람 몇 명이 일렬로 줄지어 오른쪽 인도로 들어서자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은 비껴갈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좁은 2차선 차도와 한 사람이 겨우 다닐만한 좁은 인도가 전부인 교량은 꽤 오래전에 놓은 다리인 듯했다. 오이처럼 미끈하게 쭉쭉 뻗은 날씬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봐도 인도가 너무 좁았다. 다리의 건설 연대가 궁금해졌다.  


마을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크질이르마크 강을 건너는 다리는 마을 동쪽 외곽에 D-300번 도로와 아바노스 마을 북쪽의 Kalaba 마을로 연결되는 Avanos Yolu와, 서북쪽 외곽 아쿠아 파크 근처에서 마을로 연결되는 다리, 마을 동쪽 강변 공원(Irmak Kenarı ParkI에서 모스크(Merkez Yeni Cami)로 연결되는 흔들 다리(Kızılırmak Köprüsü)와 그들이 머물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로 연결되는 크질이르마크 아바노스 다리(kızılırmak avanos köprüsü), 그렇게 모두 네 개였다. 늘 여행자들로 북적거리는 다리는 흔들 다리와 그들이 서있는 다리였고 마을 외곽으로 연결되는 두 개의 다리는 원활한 교통 순환을 위해 새로 지은 다리였다. 


크질이르마크 아바노스 다리는 오스만 제국 제34대 술탄 압둘 하미트(Sultan Abdulhamit, 1842. 9. 21~1918. 2. 10)의 통치 기간(1876~1909) 동안 궁전 건축을 담당했던 아바노스의 쿠레나 아리프 베이(Kurena Arif Bey)의 의하여 1898년에 시작되어 1900년에 개통된 다리였다. 당시 목조로 지어진 다리는 후에 1924년 아바노스의 알리 리자 베이(Ali Rıza Bey)에 의하여 수선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926년에 작업이 완료되어 콘크리트 교량으로 바뀌었다. 이후 1995년 개축 및 확장공사로 보행자 구간인 인도가 확보된 다리로 대략 120년 이상 된 다리였다. 


다리 입구에서 아바노스 마을 동쪽에서 서북쪽으로 흐르는 크질이르마크 강을 내려다보며 잠시 머물렀다. 붉게 물들어가는 강 건너 언덕 기슭의 마을을 고즈넉이 조망하기엔 그만인 곳이었다. 강 한가운데 손바닥 만한 막대모양의 사주(sand bar, 砂洲)에 가마우지와 오리, 거위, 비둘기 등 텃새와 철새까지 날아와 겨울을 나느라 북새통이었다. 물 위를 떠다니는 새들은 열심히 자맥질을 해가며 먹이활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잠시 다리 위에 머문 그들의 시야는 자연스레 무리를 이루며 떠다니는 새들을 쫓고 있었다. 고대 히타이트 문명부터 시작되어 로마, 비잔틴, 셀주크, 오스만 제국 시대까지 수천 년을 이어온 붉은 아바노스 도자기 빛깔 같은 붉은 석양이 다리 건너 마을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갯바위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홍합처럼 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우리네 도시와는 차원이 다른 마을이었다. 늘 숨 막힐듯한 도심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욕망을 애써 눌러가며 살아가는 일반적인 도시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종종걸음으로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일도 없었고, 정류장을 지나치거나 주행차선에 정차하는 버스를 따라 뛰는 모습은 볼 수 없는 마을이었다. 도로와 골목마다 가득한 차로 하루 종일 혼잡스럽고 북새통인, ‘과밀’이란 말을 붙이지 않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엔 여유마저 묻어났고 과밀에서 오는 도시의 피로도는 그림자조차도 비추지 않았다. 수천 년의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바노스 마을은 그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딴 세상사람들이 사는 듯한 마을이었다. 


크질이르마크 강을 중심으로 남단은 신시가지 북단은 구시가지로 확연히 구분되었고, 역사와 전통을 보존하는 구시가지와 편리성을 추구하는 신시가지 마을이 강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둥그런 형태를 이루며 조화롭게 형성된 마을이었다. 


대개 역사와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마을은 불규칙한 구조와 좁은 골목길, 오래된 건축 양식과 과거의 건축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가옥들이 많이 보이고, 역사적 의미를 지닌 건축물 및 유적지 보존, 자연경관과의 조화로운 풍경과 여전히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특징을 지니는데, 강 북쪽 기슭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전통을 유지해 오고 있는 아바노스 마을이 딱 그랬다.  


그런데, 그들의 눈으로 보이는 풍경이 전부가 아니었다. 골목마다 도자기 공방이 박물관을 방불케 할 정도였고, 요즘엔 주로 도자기 기업들의 공방으로 사용되고 있는 크고 작은 동굴이 언덕 기슭을 중심으로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역사 유적지 같은 마을이었다. 과거엔 주거지로 사용되었을 동굴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문서화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기원은 과거 히타이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문명의 흔적 같은 마을이었다. 


그리스의 지리, 역사, 철학자인 스트라보(Strabo, 기원전 64 or 63년~서기 24년)에 따르면 고대 아바노스 마을은 제우스 신전이 있던 곳으로 당시 카파도키아 왕국(기원전 332년~서기 17년)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십자가 조각이 특징적인 동굴교회(Dereyamanlı Kilisesi),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이 남긴 석조 주택의 형태가 남아있는 마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며 강 남쪽에 현대적인 주택과 상업시설, 도시기반 시설을 갖춘 마을이었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아바노스 마을에 하나 둘 반딧불 같은 불빛이 켜지기 시작하였다. 붉은 빛깔의 조명도 곳곳에 들어오며 언덕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 생각도 못했던 야경을 보여주었다. 완만한 언덕을 따라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이어졌고, 마치 동화 속 마을처럼 조개껍질 같은 집들이 석양빛에 물들고 있었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자리처럼 오밀조밀하게 이어지는 마을에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아바노스 마을 야경이 펼쳐졌다. 여행자를 사로잡는 풍경이었다. 너무나도 예쁜 마을 한가운데 붉은 초승달 깃발과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두 개의 모스크 첨탑은 밋밋할 수 있는 마을 풍경을 특별한 풍경으로 만들어 주었다. 강 위에 드리워진 마을 야경은 파란 하늘에 홀연히 이끌려 산책을 나온 그들에게 뜻하지 않은 선물 같은 풍경이 되었다.


원도심 반대편, 그들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왼편에 있는 스타벅스 건물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거리의 가로등 불빛도 켜지며 적당히 어두워진 시가지와 조화롭게 어우러진 건물의 조명이 들어왔고, 멀리 붉은 햇무리가 산을 감싸며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그들에게 또 다른 멋진 풍경을 선사했다. 사진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개성 있는 친구 원철도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붉게 물든 크질이르마크 강 위에 역시 붉게 물든 마을이 드리워지며 골목길을 따라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작은 불빛이 이어졌다. 어찌 보면 몽환적인, 또 어찌 보면 따듯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마을 야경이었다.


오랜 세월 아바노스 마을을 관통하며 흐르는 강은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묵묵히 지켜보며 내일로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마치 시간의 여울처럼, 예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담고 흐르는 듯했다. 때론 과거로 때론 미래로 이어지는 느낌이 드는, 마을 사람들의 삶에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을 것 같은 강이었다. 


아바노스 마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 강에서 얻은 붉은 흙으로 도자기를 구워 오늘날까지 그들의 생계와 전통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강에 의지하여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사는 사람들에겐 생명의 젖줄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강이었다. 그들의 삶의 이야기가 물줄기가 되어 흐르는 강, 크질이르마크 강가에서 아바노스 마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경험은 여행자일 뿐인 그들에겐 소중한 경험이었다. 오랜 세월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마을 사람들은 강에 의지하며 살 것이고, 마을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강은 마을 사람들에게 늘 사랑받는 존재로 남을 것이다. 


그들이 다리 위에서 바라본 마을과 크질이르마크 강은 단순한 자연경관이 아니었다. 마을의 역사와 문화, 마을 사람들의 삶과 일상이 담겨있는 아바노스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담긴 풍경이었다.


아바노스 마을의 야경을 보는 지금 시각이 17시 50분이니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이곳 아바노스 마을의 스타벅스 커피는 어떨까?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가 아메리카노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톨 사이즈가 우리 돈으로 2,100원 정도인 31리라였다. 31리라에 톨 사이즈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가격이었다. 한국에서는 톨 사이즈 커피가 대략 4,500원 정도 한다. 거의 절반 가격에 즐길 수 있다는 얘기다. 일찍이 커피문화가 발달한 나라, 터키쉬 커피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나라, 튀르키예에서 이처럼 저렴한 가격에도 훌륭한 맛의 커피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예정에 없던 마을 산책에서 얻은 또 하나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매장 안과 야외 테이블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야외 테이블엔 커피를 마시며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과 함께 튀르키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강아지라고 하기엔 엄청 큰 개 두 마리가 바닥에 누워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어쩌면 그저 자는 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흔치 않은,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곳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개에 대하여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튀르키예를 여행하면서 유적지고 마을이고 엄청나게 많은 개와 고양이들이 이곳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열기구 투어를 끝내고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개들이 파일럿 주변으로 다가왔고, 파일럿과 스텝들은 그런 개들에게 먹이를 먹여주고 따듯하게 쓰담쓰담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괴레메 야외박물관에선 그들에게 다가와 꼬리를 흔들며 친근감을 보이며 함께 사진도 찍어주는 제법 영특한 견공을 만난 적도 있었다. 


이곳 튀르키예 사람들이 상당히 개를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생명에 대한 지극히 따뜻한 마음과 사랑으로 품어주고 거둬주는 이곳 사람들의 자애심 내지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 모든 생명체를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 생명에 대한 존중심에서 비롯된 일인지, 그도 아니면 품종 자체가 온순해서인지, 그리고 이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인지, 가는 곳마다 보이는 이곳의 개들은 상당히 유순하고 사람을 따르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딱히 누가 키우는 것 같지 않은 떠돌이 개인 듯한데, 낯선 사람을 봐도 크게 짖거나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질 못했다. 사람들을 무척이나 따르는 건지 떠돌이로 사는 생존방식인지 모르겠지만, 관광객들에게 늘 먼저 꼬리를 흔들며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우리네 사정으로 보면 유기견이고 야생화된 들개인데,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동네에서 키우는 개들도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울타리 안에서도 본능적으로 극성스레 짖어대는 게 보통인데, 이곳의 개들은 짖는 것은 고사하고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니 먹을 것을 갖고 있지 않은 그들이 오히려 무안할 지경이었다. 얼핏 들은 얘기이긴 한데, 튀르키예 관공서에는 이런 들개를 보호하기 위한 부서가 따로 있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상팔자인 꽤나 살기 좋은 땅이지 싶었다.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튀르키예 떠돌이 개에 대하여 언급해 보면, 이스탄불 수의학 서비스 책임자인 Muhammet Nuri Coşkun는 이스탄불만 해도 떠돌이 개가 13만 마리로 추산된다고 한다. 차나칼레(Çanakkale)의 갈리폴리(Gallipoli) 지역에 있는 한 고등학교 학생들은 사회적 책임 활동의 일환으로 용돈으로 길 잃은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한다. 시 외곽 숲으로 유기견을 추방하는 정부정책에 반대하며 시위하는 시민들과 동물보호단체의 의견도 있다고 한다.


https://www.trthaber.com/haber/yasam/istanbuldaki-sahipsiz-kedi-kopek-sayisi-aciklandi-311559.html 



튀르키예에서 길고양이는 무함마드가 고양이를 좋아했었다는 이유로 우대받고, 반면 개는 종교적으로 터부시됩니다만, 이곳 사람들이 떠돌이 개에게 매우 친절한 편이란 것은 며칠만 여행하다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튀르키예 국민의 약 45%는 길 잃은 동물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반면, 34%는 그렇지 않다고 내무부 산하 부서에서 실시한 한 연구결과도 보고된 바 있다. 조사에 따르면, 67% 이상의 사람들이 거의 매일 길 잃은 동물을 만나고 있지만, 13.6%만이 그러한 동물에게 공격당한 적이 있다고 말했고, 거의 62%는 그런 사고를 경험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참가자의 약 28%는 길 잃은 동물의 공격을 목격했다고 답했다. 유기동물을 보호소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39%에 불과했지만, 45% 이상은 자연환경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는 반대 의견을 보였다. 


https://www.hurriyetdailynews.com/most-turks-do-not-think-of-stray-animals-as-dangerous-172486


그런데, 떠돌이 개의 공격과 사고 사례가 심심찮게 보도되는 것도 현실이다. 매년 떠돌이 유기견 공격에 의한 사고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튀르키예 정부는 유기견 문제 해결을 위해 사람들이 개를 키우고자 할 때 강력한 인증제도를 적용하고 있다. 또한 떠돌이 개들을 구조하고, 치료하고, 새로운 가족을 찾아주는 활동과 함께 중성화 수술을 통해 개체 수를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동물 학대 방지를 위한 캠페인과 동물 복지 증진을 위한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민간단체 또한 정부기구와 협력하여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는데, 동물권 협회 HAYTAP(Hayvan Hakları Yardımlaşma ve Tanıtma Derneği)는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동물 보호 단체이고, 길거리 동물 재활 센터 SHRM(Sokak Hayvanları Rehabilitasyon Merkezi)는 정부 산하 기관이다. 이 외에도 BARDAK (Barınma ve Rehabilitasyon Derneği), TURKISH 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ANIMALS (TDHK) 등 동물보호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세상 어디나 그렇듯 모든 사람이 길거리 동물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 싶다. 호의적인 의견이 많긴 하지만 거리를 배회하며 더러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기도 하는 동물들이 길거리에 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반대의견 또한 많다. 유기견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심각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야생화되고 들개화 된 유기견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일도 발생한다. 


https://www.khan.co.kr/local/Jeju/article/202210091406001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0803500049 


튀르키예의 떠돌이 개 또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와 동물 보호 단체, 그리고 시민들의 협력이 필요해 보이는 이유이다.  


아무튼 그들을 공격하는 떠돌이개는 아직 보질 못했지만, 여행자들은 다소 주의가 필요해 보이는 튀르키예의 떠돌이 개 이야기를 좀 길게 했다. 여행자의 경우 개에게 먹이를 주거나 만지작거리는 것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먹이를 주게 되면 다른 개들이 모여들어 먹이 다툼이 일어날 수 있고 공격적인 면을 드러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것저것 뜻하지 않은 선물을 가슴에 담고 호텔로 돌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눈빛만 보아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친구들을 부추겨 먼 이국 땅으로 떠나자며 함께 이곳으로 날아왔다. 그저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걸으며 지난 세월의 끝자락을 잡아 보기도 하였고,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마을 언덕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봄 같은 따듯한 날씨에 움츠리고 가라앉아 있던 무거웠던 몸과 마음을 신문 한 귀퉁이에 실려 있는 삽화揷畫처럼 가벼이 내려놓았다. 늘 낯설게 느껴지는 갑갑했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고 몸도 가뿐하고 산뜻해졌다. 뜻하지 않게 좋은 구경을 했고, 스적스적 두어 시간을 걸었으니 시장기도 느껴졌다. 


내일 하루가 지나면 해가 바뀌는 연말이었다. 송년을 맞이하여 호텔에서 준비한 저녁식사는 그야말로 진수성찬,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음식천국이라 할 수 있었다. 각종 먹거리가 넘쳐나는 튀르키예 땅에 발을 디뎠음을 실감케 해주는 호텔 뷔페를 보니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요리는 물론이고 산해진미를 모두 한 곳에 모아놓은 듯했다. 코너마다 셰프가 직접 나와 즉석으로 요리를 해주는 특별한 저녁식사였다. 그야말로 흔치 않은,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호사스러운 밥상을 받은 느낌이었다. 지중해, 발칸, 중동 요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튀르키예 요리는 다채로운 맛과 향으로 전 세계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세계 3대 요리 가운데 하나라는 데, 과연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통해 발전한 독특하고 풍부한 요리 문화답게 허명은 아니지 싶은 저녁식사였다. 이렇게 호화스럽고 요란하게 저녁을 먹어도 되나 싶었다. 평소 맛있는 음식은 기분까지 전환시키는 마술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뇌에서 도파민과 세로토닌과 같은 행복 호르몬이 분비되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오랜 지기들과 함께 여행을 와 새로운 음식까지 시도하며 즐기는 맛있는 음식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충만해지는 시간이었고 다양한 맛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연말을 맞아 특별히 준비한 성의를 봐서라도 일단 맛있게 먹어주는 일이 그들의 일이지 싶어 눈으로도 입으로도 맛있게 식사를 했다. 


오늘 밤은 특별히 벨리댄스 야간 공연을 보는 날이었다. 밤 8시에 호텔에서 출발하여 낮에 들렸던 우치사르 근처에 동굴을 파서 지은 벨리댄스 공연장 '할라얀 카야 레스토랑(Halayhan Kaya Restaurant)’으로 갈 예정이다.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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