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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환 May 03. 2024

인류 문명의 단층과도 같은 카파도키아



옛날 옛날 아주 오랜 예전에 여행은 목숨을 걸고 하는 탐험 같은 거였다. 이탈리아 탐험가라 해야지 맞지 싶은 마르코 폴로 Marco Polo(1254년~1324년)는 17세(1271년)에 고향을 떠나 아시아를 탐험하고 20년(1292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는 왜 20년이나 세상을 여행했을까?

순전히 마르코 자신만의 의지로 20년 중국 살기를 했을까?

숱한 고생과 죽을 고비를 넘으면서 왜, 무엇 때문에 그토록 오랫동안 중국 살기를 한 걸까?


마르코 폴로가 여행을 떠난 것은 순전히 아버지 니콜로 때문이었다. 베네치아 상인이었던 니콜로는 마르코 폴로가 태어나기 5개월 전 실크로드 원정을 떠나 15년 만에 돌아온다. 15살이 된 마르코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상봉했고 17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떠난 것이다. 어쩌면 베네치아 상인 집안의 아들로 태아 난 운명 같은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조정 관리가 되어 1292년까지 17년간 중국의 주요 도시와 몽골, 베트남 등지를 여행하며 숱한 고비를 넘기고 20년이나 지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코였다.


말이나 낙타를 이용했던 당시의 교통과 문물, 여행 경로를 감안하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지만, 결정적으로 마르코에게는 오늘날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이기가 없었기에 그토록 긴 여행을 한 건 아닐까?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해보게 된다.


요즘은 손바닥에서 어느 식당 어떤 음식이 맛있는 지까지 알 수 있는 세상이다. 마르코 폴로가 여행을 하던 과거엔 상상도 못 했던 세상이다. 구글 지도를 열어보면 정말 많은 정보가 손바닥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돈으로 1~2만 원이면 유심침이나 eSIM을 사용할 수 있고, 인터넷만 된다면 필요한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으면 위치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어 자신이 밥을 먹은 식당이 어디인지, 잠을 잔 곳은 어떤 호텔인지 확인이 가능하다. 더욱이 가장 큰 문제인 언어 문제도 어느 정도 번역기로 해결할 수 있는데, 금년에 출시되는 갤럭시 s24모델엔 동시 통번역과 실시간 대화가 가능한 AI가 탑재된다 한다. 그렇게 놀랄만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요즘의 여행은 마르코가 여행하던 시절과는 판이하게 다른, 여행이라 쓰고 호사라 읽어야 맞지 싶다.


아무튼 그들은 항아리 케밥을 게눈 감치듯 맛있게 먹고 나왔다. 동굴식당에서 먹는 케밥은 독특하고 색다른 경험이었으며 카파도키아 음식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항아리에 담긴 재료만 보더라도 꽤 많은 재료가 들어간 음식이었다. 우리네 찜 요리와 유사한 카파도키아 항아리 케밥에 담긴 역사적 문화적 깊이는 그리 간단치 않아 보였다.


튀르키예 음식은 과거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였던 영토만큼이나 다양했을 것이고, 다양한 재료와 다양한 요리법이 오스만 제국의 번영으로 자연스럽게 통합된 결과일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중동과 유럽, 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해 있어 다양한 식재료와 조리법이 수용되었을 것이다. 지중해의 신선한 해산물, 중동 지역의 향신료 등 다양한 지역에서 제공받는 식재료는 튀르키예 음식에 상당한 다양성과 특별한 맛을 제공했을 것이다. 오늘날 튀르키예 요리는 프랑스, 중국요리와 함께 세계 3대 요리로 회자된다.


식당 주차장으로 나와보니 외벽에 술병을 가득 매달아 놓았다. 대부분 맥주병과 와인 병인데, 간혹 한국사람들이 먹고 갔지 싶은 ‘참이슬’ 플라스틱 병도 보였다.


이 병들을 왜 여기에 매달아 놨을까? 단순히 인테리어 개념으로 달아 놨을까? 그다지 인테리어 효과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러고 보면 튀르키예 사람들은 벽이고 나뭇 가지고 주렁주렁 뭔가를 매달아 놓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랜드 바자르’ 이야기에서 잠시 언급했던 부적같이 사용되는 나자르 본주 같은 것인가? 푸른색 병이니까? 나자르 본주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재 같은 것일까? 그렇다면, 나자르 본주를 걸어 놓으면 될 일인데…, 벽에 병을 매달아 놓은 것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퍼즐조각을 끼어 맞춰보는 그의 상상력은 곧 한계에 부딪쳤고,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배처럼 더 이상의 다른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일종의 풍습이나 어떤 곡절이 있는 것이라면 다른 곳을 여행하면서도 또 볼 수 있지 싶었다. 이 의문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아 그대로 물음표로 남겨 두기로 했다.


안에서 보았을 때 보다 밖에서 식당 규모를 보니 상당히 큰 건물이었다. 주차장에서 건물을 보니 이 식당 건물이 어떻게 지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커다란 너른 바위를 절개하여 반쯤은 주차장을 확보하였고, 절개된 곳에서부터 굴을 파 내부 공간을 확보하고 최종적으로 절개한 바위에 벽돌을 쌓아 벽체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식당 출입구가 있는 도로(Hacı Alibey Cd.)에서 보면 단층이었지만 주차장 외부 벽체로 봐선 최소 2층 이상의 규모였다. 유심히 살펴보니 출입문 옆에 둥근 응회암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응회암에 덧대어 석축을 쌓아 외부 계단까지 만들어 사용의 편리성을 추가한 동굴 집이었다. 스마트폰을 열어 지도를 보니 식당 옆으로 3성~5성급 동굴호텔이 7~8개가 바로 촤르륵 지도에 표시된다. 카페나 레스토랑은 말할 것도 없이 많았다. 여행에 이만한 가이드가 또 있을까 싶다.         


항아리 케밥으로 점심식사를 마친 동굴식당에서 10여분 거리의 우치사르로 이동했다. 시간은 오후 3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카파도키아의 기암과 절경을 이루는 지형은 네브셰히르 Nevşehir를 중심으로 크르셰히르 Kırşehir, 니데 Niğde, 악사라이 Aksaray, 카이세리 Kayseri에 걸쳐 약 250㎢ 면적에 분포되어 있다. 침식작용과 풍화작용에 의하여 형성된 독특한 기암으로 이어지는 지질적 특성을 보이는 이 지역을 카파도키아라 지칭한다.


그들은 카파도키아 네브셰히르를 거점으로 우치사르 Uçhisar, 괴레메 Göreme와 데린쿠유 Derinkuyu, 타임지가 선정한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할 10가지’ 목록에 선정된 카파도키아 열기구를 타고 카파도키아 파노라마를 관광할 예정이었고, 그 첫 번째 목적지인 우치사르로 이동한 것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카파도키아, 이걸 뭐라 표현해야 할지 적절한 어휘는 머릿속을 맴돌며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도저히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지 싶었다. 이걸 풍경이라 말해도 되는 것일까 싶었다. 아무튼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겸손해지고 또 겸손해지는 그런 느낌의 풍경은 그야말로 딱 ‘신의 영역’이라 할 밖에 다른 수식어를 붙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해 보였다. 참으로 인간의 영역이 얼마나 미미하고 하찮은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카파도키아 파노라마를 마주하며,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무기력함과 진부한 한계를 또 한 번 절실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호기심과 궁금증은 정원을 벗어나 숲으로 달리고 있었다.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어 그저 신의 영역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땅에 대한 궁금증이 저 깊은 땅속에서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느낌이었다.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수많은 의문과 호기심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머물며 추억을 담기에 바쁜 모습이었다. 그들이 버스에서 내린 곳은 Göreme-Uçhisar Yolu 도로변에 그저 좁다란 초승달 같은 공터였다. 우치사르를 찾는 사람들에겐 유일한 도로가 아닌 땅이었다. 그저 말뚝을 박고 밧줄을 매어 겨우 보차도를 구분해 놓은 땅엔 낙타와 말을 이용하여 영업을 하는 상인들과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었고, 고만고만한 구멍가게들이 도로변을 따라 들어서 있었다. 상점에서 파는 것이라 봐야 토스토와 돈두르마, 커피, 기념품, 도자기 등이 전부였고 간혹 의류나 머플러, 모자를 파는 정도였다. 나뭇가지에는 어김없이 나자르 본주와 항아리 케밥을 요리하는 아바노스 항아리가 주렁주렁 걸려있었다.


그들은 살짝 경사진 바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오르내려서 인지 모래알 같은 작은 알맹이들로 미끄러운 응회암 바위 사면이었다. 불쑥불쑥 솟은 원뿔형 바위 표면엔 네모나거나 둥근 모양의 벌집 같은 구멍이 빼곡히 파여 있었다. 지척에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풍경을 바라보며 시야를 천천히 옮기는 그들의 눈으로 오후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우치사르 꼭대기엔 이곳의 기암을 닮은 듯한 모스크 첨탑이 어김없이 솟아 있었다. 파란 하늘아래 불쑥 솟은 바위 성 같은 풍경 꼭대기엔 어김없이 붉은 초승달 국기가 나부끼고 있었고, 언덕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 바위에 기대어 들어서 있었다. 정말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하늘마저 어찌 저리도 파란 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반달까지 떠있었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 따로 없지 싶었다. 이백(李白)이 카파도키아를 다녀간 것도 아닐 텐데, 참으로 기막힌 비유를 남겼지 싶은 풍경이었다.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나온 별유천지는 신선이나 살 법한 이상세계를 이르는 말인데, 별유천지는 맞지만 신선은 없었고 절경을 찾은 사람들만 가득했다.



인류 문명과 역사의 단층과도 같은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 Kapadokya란 지명은 고대 히타이트어로 ‘아래 땅’이라는 뜻의 카타 페다 katta peda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페르시아는 '저지대를 의미하는 Katpatuka'란 말로 카파도키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다. 이 말을 그리스어 Καππαδοκία(카파도키아)로 음차 하여 오늘날 튀르키예어로 Kapadokya(카파도키아)라 쓴다. 그리스 역사가이자 지리학자였던 헤로도토스 Herodotus의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곳 아나톨리아반도 중부내륙지역에 모여 살았던 사람들을 '카파도키아인 Kapadokyalıların'이라 불렀다 한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고대 카파도키아 주민들을 ‘류코 시리아인 Leucosyrian 백인-시리아인'을 뜻하는 ‘류코시리 Leucosyri’라고 하였다. 페르시아든 그리스든 자신들이 보고 들었던 고대 아나톨리아 중부 내륙의 카파도키아에 대하여 자신들의 언어로 남긴 소중한 기록들인 셈이다.


과거 오래전엔 우치사르 꼭대기까지 흙이 덮였을 것이다. 오랜 기간 빗물이 스며들고 침식되어 계곡이 드러나고 바람에 풍화되며 지금의 바위가 드러났을 것이다. 이곳의 해발 높이는 평균 1000m 안팎이다. 땅이 침식되며 땅에서 또 땅이 드러나고 침식되지 않은 바위만 남은 셈이다. 고대 사람들이 이곳을 왜 ‘땅 아래의 땅’이라 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는 수많은 기암이 이어지는 이 땅은 아주 먼 옛날 땅 속에 숨어있던 땅인 셈이었다.  


카파도키아는 청동기 시대 중앙 아나톨리아 지역의 하투사 Hattusa를 수도로 한 히타이트문명의 중심지이다. 인류 최초의 철기문명과 전차를 사용했던 히타이트문명은 기원전 18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북중부의 카파도키아 고원을 정복하고 하투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제국이다. 기원전 14세기에 이르러 아나톨리아의 대부분과 시리아 북쪽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 바빌론과 남쪽으로 리타니 강 하구(지금의 레바논),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장악한 소아시아(아나톨리아 Anadolu) 지역의 대 제국이었다. 기원전 1286년엔 람세스 2세 Ramesses II의 군대를 가데쉬 전투(KadeşSavaşı, Battle of Kadesh)에서 격퇴하는 등 이집트 다음가는 강력한 제국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남쪽으로는 리비아, 동쪽으로는 레반트 Levant(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요르단, 레바논) 지역까지 역대 왕조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신왕국 시대였다. 기원전 1550년~1070년까지 이어지는 파라오 통치의 신왕국 시대는 강력한 국력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시기로 히타이트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는 형국이 된다. 결국 아라비아반도의 이집트와 아나톨리아반도의 히타이트 제국은 당시로선 용호상박(龍虎相搏)이었던 셈이었다. 따라서 막강한 두 세력 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23세기 하티 Hatti 왕 팜바(Pamba)에서부터 기원전 1178년 히타이트 제국의 마지막 왕인 수필룰리우마 2세(Crowned Suppiluliuma II)까지 이어졌던 강력한 히타이트 제국은 돌연 자취가 묘연하게 역사에서 사라지고, 여러 독립된 도시국가 형태인 네오 히타이트(Neo-Hittite)로 나누어져 기원전 8세기까지 존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게 이렇게 강력한 제국이 돌연 역사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역사적인 미스터리로 남아있는데, 해양세력(그리스)에 의하여 무너졌다는 학설과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곳에 동화되었다는 설, 그리고 일부는 카파도키아 왕국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마도 이들이 히타이트 제국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한 학자는 인류가 알지 못하는 외계의 존재에 의하여 공격을 받고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던 히타이트 제국의 미스터리이다.


아무튼, 이때 한참 세력을 확장하였던 신왕국 시대의 이집트도 리비아인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거점으로 기원전 2450~609년, 대략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존속했던 아시리아 Assyria (‘앗시리아’라고도 한다.) 제국의 침입으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후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의 침입이 시작되고 결국 기원전 343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멸망한다. 이후 정복한 이집트 땅에 이집트 제국의 제31왕조를 세운 페르시아인도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벌로 마케도니아 출신이고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우며 한때 강력한 파라오의 이집트 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집트 제국과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은 서로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여행자일 뿐인 그의 개인적인 생각과 제한적인 견해이다.


히타이트 제국의 중심지였고 히타이트의 철기문명을 가졌던 아나톨리아의 철기시대 사람들인 카파도키아 무슈키(Mushki)는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과 함께 점차 쇠퇴하고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침공 때까지 겨우겨우 명맥이 이어지다 기원전 470년경 아케메네스 왕조에 의해 건국된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제국 Achaemenid Empire)의 속주(샤트라피 satrapy)가 된다.


이후 기원전 332년 페르시아인을 정복한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이곳. 아나톨리아반도 중부내륙의 카파도키아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이때 카파도키아 왕국은 결속되나 기원전 3세기 로마의 세력이 아나톨리아반도에 미치고 기원전 1세기엔 로마에 의해 카파도키아 왕이 임명되고 폐위되는, 사실상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다 서기 17년 로마의 속주가 되며 카파도키아 왕국은 멸망한다.


결론적으로 히타이트인들의 정착지였던 카파도키아는 프리기아 Phrygia(트로이아 멸망 후 아나톨리아반도 동쪽으로 진출했던 트로이아의 복속국), 아시리아, 페르시아, 비잔틴, 로마, 셀주크, 오스만 제국과 같은 강력한 제국 간의 전쟁과 문명의 충돌이 켜켜이 쌓인 인류 문명과 역사의 단층과도 같은 곳이었지 않나 싶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마을 우치사르


초기 기독교인들이 카파도키아에 온 것은 서기 3세기의 일이다. 303~308년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하였을 때 이곳은 그들에게 종교적인 중심지요 삶의 안식처가 되었으며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이상적인 곳이었다. 기암으로 이어지는 계곡과 화산에 의하여 형성된 응회암 언덕과 계곡의 바위를 깎아내고 파내어 만든 동굴 은신처는 로마의 억압과 박해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위 동굴에 서식하는 비둘기 똥으로 농사까지 지으며 살았던 삶의 터전이었다.


이후 아라비아반도의 이슬람 세력인 아랍인들의 아나톨리아반도 진출로 이 지역으로 피신하는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동굴 수도원과 교회, 지하도시가 확장되나 11~12세기에 카파도키아는 셀주크 제국에 점령되고 이어서 오스만 제국의 수중에 들어간다. 박해를 피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카파도키아에 정착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곳 지형을 이용하여 바위를 깎아내고 동굴을 파 주거지와 암굴 교회를 지었으며 데린쿠유 Derinkuyu, 카이마클리 Kaymakli, 아바노스 인근의 외즈코낙 Ozkonak 같은 역사적인 지하 도시를 남긴다.


우치사르 Uçhisar는 튀르키예어로 '외부 성채'를 의미한다. 산기슭으로 오르며 이어지는 언덕에 같은 모양은 단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자연이 빚어낸 뾰족뾰족한, 스머프 마을에서나 나올 법한 ‘요정굴뚝’이라는 거대한 원뿔형 기암들이 수도 없이 이어지는 언덕 기슭에 형성된 마을이다. 당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우치사르에서 가장 높은 60m의 바위를 뚫고 파내어 동굴처럼 연결된 통로와 방을 구축하여 적들의 침입을 감시할 수 있는 관측소를 지었다. 일종의 군사적 목적의 방어 시스템인 셈이다. 우치사르의 가장 높은 바위에 지은 성채, Uçhisar Kalesi는 현재 대부분 막혀있고 일부 통로를 개방하여 성채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다. 과거 비잔틴 시대에는 약 1,000명의 사람들이 주거지로 사용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주거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정상에 오르면 카파도키아 파노라마를 볼 수 있는 멋진 전망대 역할을 하는 셈이다.


과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였던 카파도키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치사르 마을 사람들의 생업도 농업이었다. 하지만 바위를 뚫고 파내어 지은 동굴 형태의 석조 주택들이 호텔이나 항아리 케밥 식당, 동굴 리조트나 스파, 선물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 등 관광객을 위한 시설로 바뀐 것으로 보아 지금은 관광업이 이들의 생계를 지탱하고 있는 듯했다. 버스를 타고 이곳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오면서 보니 동굴식당, 동굴호텔 등 관광 사업을 목적으로 최근에 지어진 시설들과 주거지가 새로운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보였다. 우치사르 홈페이지 https://uchisarcappadocia.org/ 를 찾아보면 이곳에 동굴 형태의 호텔 케이브 스위트 등 관광시설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형성된 동굴 마을 우치사르에 머물며 독특한 지형에 독특한 삶의 형태를 마주하게 된다. 눈앞에 펼쳐지는 믿기 어려운 엄연한 사실 앞에 탄성을 자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주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그렇게 일반적인 탄성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일반적인 탄성만으론 이곳에서 살았던 옛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에 더 압도되는 경우가 있다. 그에겐 지금이 딱 그 경우였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탄성조차 허락되지 않는 기암으로 이어지는 절경이긴 하지만, 눈에 보이진 않으나 과거 이곳에 동굴을 파고 생활 꾸렸던 사람들의 일상은 엄연히 존재했던, 보이는 것보다 더 압도되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존재했던 사람들의 일상을 과연 상상이나마 가늠할 수 있을까? 원뿔 형태의 응회암 바위에 굴을 뚫어 생활하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과거 카파도키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을 우치사르를 보면서 과거 이곳에 삶의 터전을 꾸리고 신앙적인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초기 기독교인들과 현재를 살고 있는 오늘날 카파도키아 사람들의 삶이 사뭇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살기 위하여 바위에 굴을 뚫어야만 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강인한 결기가 뚜렷이 느껴지는 순간이었고, 어떻게든 지키고자 하였던 기독교 신앙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의지가 오롯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암벽과 바위를 깎고 다듬어 마구간까지 딸린 동굴 주거지와 교회, 수도원과 방어시설인 우치사르 관측소 등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우치사르 마을의 예전 모습으로 과거 이들의 삶의 모습이 조금은 그려지기도 했지만, 그가 본 카파도키아의 지극히 일부인 우치사르의 모습만으론 어디까지나 그저 짐작일 뿐이었다. 우치사르 계곡 카페에서 산 터번을 머리에 쓴 민수의 모습에서나마 잠시 고대 우치사르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더더욱 어림 반 푼어치 없는 일이었고, 숨 막히는 절경과 함께 남아있는 우치사르 앞에서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참을 허둥대다 결국 적절하게 표현할 말이 없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생애를 전부 되돌아보아도 결코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풍경을 보며 그저 신들의 영역이라 할 수밖에 없는 카파도키아 한 귀퉁이에 불과한 우치사르를 보며 다소 흥분되는 듯 콩닥거리는 마음을 잠시 가라앉혀야만 했다.


카파도키아에서 이틀을 머물 예정이기에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15시 40분, 도자기로 유명한 아바노스 마을 근처에 있는 그랜드 아바노스 호텔로 체크인을 하고 잠시 호텔방에서 쉬기로 했다. 호텔로 들어가며 바라본 호텔 발코니의 모습이 마치 우치사르에서 보았던 동굴 주택의 모양과 너무나도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호텔을 지으면서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동굴주택을 모티브로 한 모양이다. 그의 눈에만 그렇게 보였을까?


호텔방 침대 위에 걸려있는 힘차게 달리는 말 그림은 이곳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페르시아어 ‘Katpatuka’는 튀르키예어로 ‘İyi Atlar Ülkesi’ 즉 ‘좋은 말의 땅’, 또는 'Güzel Atlar Ülkesi, 아름다운 말의 땅'이란 뜻의 말이기도 하다. 동서 교역의 통로였던 비단길, 실크로드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카파도키아의 좋은 말은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생명과도 같은 이동 수단이었을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과거 제국이 세워지고 세력이 충돌되었던 시절엔 많은 전투마를 사육하였을 것이 너무나도 자명해 보였다. 실제로 그는 이틀의 카파도키아 여정 동안 이곳을 여행하며 꽤 여러 곳의 말 목장을 보았고, 따듯한 기후로 겨울철임에도 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을 볼 수 있었다.


모처럼 일찍 호텔방으로 돌아와 소주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활짝 웃는 민수와 원철의 모습은 더도 덜도 아닌 이곳의 파란 하늘과 닮았지 싶었다. 아마도 카파도키아 여정에 매우 만족 해하는, 튀르키예 여행을 오게 된 자신들의 판단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는 확신으로 가득 찬 모습이지 싶었다. 이 또한 순전히 그만의 생각일까? 아니면 튀르키예 여행을 친구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며 함께 가자 했던 그의 흔치 않은 자뻑일까? 아무튼, 함께 여행하기 딱 좋은 오랜 친구(舊友)이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같이 늙어가는 친구와 튀르키예를 여행하게 된 것은 자뻑이든 아니든 참으로 큰 행운이지 싶었다. 학창 시절 연주했던 '행진곡 구우(舊友)’의 멜로디가 기분 좋게 떠오르는 카파도키아 그랜드 아바노스 호텔에서의 달콤한 휴식으로 잠시 쉬어 가는 여행을 즐기는 그들이었다.

https://youtu.be/_vvIB55kgoI?si=cf2h-YDmVG0LEPPH

행진곡 구우(舊友) Alte Kameraden

작곡 : Carl Albert Hermann Teike

연주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 휘 : H. V. Karajan (카라얀)

@thebcstory


#튀르키예 #터키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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