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역사의 이면이 얽혀 있는 와인마을 쉬린제 Şirince
어제 파묵칼레 언덕으로 진주 같은 햇살을 뿌리던 해가 떠오르며 어김없이 새날이 밝았다. 오늘 일정은 이곳 Karahayit에서 셀주크의 와인 마을 쉬린제 Şirince를 거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 Artemis Tapınağı과 헬레니즘 시대에 건축된 원형극장과 켈수스 도서관 Celsus Kütüphanesi 등 고대 도시 에베소 Ephesus Ancient City 유적을 관람할 예정이다. 데니즐리에서 에게해를 끼고 있는 이즈미르 İzmir 남쪽의 셀주크까지 가야 하니 아마도 오전 내내 버스를 타야 할 것이고 점심때나 되어서야 셀주크에 도착하지 싶다. 호텔 조식으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부지런히 행장을 꾸려 출발한다.
간디는 “가장 위대한 여행은 지구를 열 바퀴 도는 여행이 아니라 단 한차례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이다.”라는 교훈을 남겼다. 간디의 말처럼 나 자신을 돌아보고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튀르키예 땅을 밟은 지 여드레가 지났다. 이스탄불에서 시작한 튀르키예 여행이 앙카라, 베이파자르, 카파도키아, 콘야를 거쳐 ‘황소의 등뼈’라 하는 토르스 산맥을 넘어 아나톨리아 반도 남쪽 해안의 안탈리아, 그리고 붉은 햇살 아래 유난히도 아름다웠던 파묵칼레를 거쳐 서부 에게해 연안의 셀주크로 가고 있는 중이다.
평소 일상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기가 그리 쉽지 만은 않은 일임을 대부분 동의하리라 본다. 도무지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자신을 돌아보고 살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자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익숙하지도 않은데, 나 자신을 찾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여행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에 틀림이 없지 싶다. 일상을 훌훌 털고 떠나, 반복되는 삶 속에서 잠시 벗어나 낯선 곳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만 있으면 그 여행은 참으로 유의미한 여행이 될 것이다.
차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먼 훗날 지나온 여정을 되돌아보며 여행지마다 두고 왔던 이야기를 꺼내 볼 것이다. 젊은 날의 삶은 누구에게나 반짝이는 날일 것이다. 부족하기 마련이고 미완성이기 마련인 젊은 날을 되돌아보면 무슨 뒷배로 그렇게 무모하리 만치 용감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지혜롭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한없이 깊은 후회의 나락으로 밀어 넣을 것만 같지만 꼭 그렇지만 않았던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덕에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있으니 말이다. 인생을 포함하여 인생사 모든 일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어찌 보면 생각하기에 따라, 같은 사안을 두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향배가 결정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차창 밖으로 들판도, 들판 위에 서있는 나무들도,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도 빠르게 지나간다. 그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 아침 안개에 휩싸여 다소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아침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 보니, 어느 순간 차르르 돌아가는 흑백 영사기 소리가 들리고 어린 시절부터 지나 온 날들이 어두운 극장 스크린에 빛으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곧 찌그러질 것 같은 의자에 앉아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 클로즈업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은 어디로 사라지고 낯설지 않은 소년의 등장으로 시작되는 흑백 필름은 그렇게 차르르 소리를 내며 이어진다. 마치 한 곳을 뚫어지게 보는 것 같지만 초점이 흐려지며 전혀 다른 세계가 보이는 매직 아이처럼 지금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그렇게 잠시 동안이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단숨에 거슬러 올라가다 버스가 어느 휴게소에 들어서면서 화들짝 놀라며 흑백영화에서 빠져나온다.
작은 상점과 주유소가 있는 휴게소 Meandros Dinlenme Tesisleri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거리상으론 아이딘(Aydin)이란 도시 못 미쳐 나질리(NAzilli)를 지난 D320번 도로 중간 지점이다. 앞으로도 온 것만큼은 달려야 셀주크에 도착하지 싶다. 버스에 내려 잠시 휴게소 구내를 가볍게 걸으며 쉬어 간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쯤 달려 Leathrium 이란 가죽 매장에 잠시 들른다. 이 지역 주요 산업 중 하나인 유럽 유명 메이커 OEM 생산 방식의 공장에서 나오는 B 품의 양가죽 의류 제품이 주요 상품인 매장이다. 버스 타는 것이 지루해지는 참에 눈으로 구경만 하고 매장을 나온다. 그리고 다시 이동하여 11시 40분경 셀주크의 Efes Villa란 간판으로 영업하는 한국 식당에 당도하여 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한다. 식당 벽면에 이즈미르 한인회 이름으로 교민회관 건립 및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 건립사업을 위한 비영리사업 안내문도 붙어있는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친구들은 오랜만에 입맛에 맞는지 고추장을 한 숟가락 듬뿍 넣어 쓱쓱 비벼 한 그릇을 뚝딱 맛있게 해치운다. 이런 것을 보면 뭐니 뭐니 해도 늘 먹는 음식이 역시 좋은 모양이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마친 후 12시 30분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인 쉬린제 마을에 당도한다.
우리는 쉬린제 마을 입구에 있는 아르테미스 레스토랑 & 와인 하우스(Şirince Artemis Restaurant ve Şarap evi)에 들려 쉬린제 마을의 와인 시음과 간단한 마을의 역사 이야기를 듣는다.
쉬린제 Şirince는 튀르키예어로 ‘즐거움’을 의미한다. 1926년 이전엔 ‘못생긴’을 의미하는 체르킨제(Çirkince)라 하였다. 이 지명에는 슬픈 역사의 이면이 얽혀 있다. 그리스인들에 의해 형성된 이 마을은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15세기에 기독교 성지였던 에베소(Ephesus)가 버려지면서 지역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해방 노예들이 대거 이주해 정착한 산간마을이다. 이곳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튀르크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못생긴’,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더럽고 추하다’는 의미의 치르킨제(Çirkince)를 지명으로 사용한다. 이들은 오스만제국의 지배 400년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로 이곳에서 고향과 같이 흰 회벽에 붉은 기와를 올려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마저 튀르키예-그리스 간 전쟁(아타튀르크 주도로 오늘날 튀르키예 영토를 확보한 전쟁)이 끝나고 1923년 민족 교환 조약에 의해 그리스인들이 돌아가면서 마을은 폐허가 된다. 당시 민족 교환 조약은 그리스에 살던 튀르키예인 122만 명, 튀르키예에 살던 그리스인 약 40만 명이 서로의 조국으로 돌아갔는데, 양측 160만 명에 달하는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진 조약이다. 1926년 이즈미르 주 정부 주도로 마을 이름을 ‘즐거움 또는 쾌적한’(Pleasant)을 의미하는 쉬린제(Şirince)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지만 기원전 323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헬레니즘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유서 깊은 이 마을에 그 누구도 들어와 살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1908~1909년까지 오스만제국의 공식 기록인 연감(Salname)에는 “마을에 1,000채 이상의 집이 있었고 모두 그리스 정교회 기독교인들이 거주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2~3천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923년 민족 교환으로 마을이 폐허가 된 셈이다. 더욱이 인근의 셀주크가 도시화되면서 1950년대 이후 마을 사람들은 셀주크로 이주하면서 급속하게 쇠퇴한 마을이다. 그러던 차에 1990년 언어학자 세반 니샨얀 Sevan Nişanyan과 그의 아내 Müjde Tönbekici이 다 쓰러져가는 Şirince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 복원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국가 유산으로 지정받고 폐허가 된 역사적인 주택을 개조하며 다시 사람들이 이곳으로 들어오고 마을이 복원되어 이곳에서 생산되는 올리브, 포도, 사과, 복숭아로 생산된 과일을 이용하여 과실주와 와인을 생산하며 관광객이 즐겨 찾는, 셀주크의 와인 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 쉬린제 마을이다.
설명도 잘 듣고 와인 시음도 마쳤으니 마을 구경을 하기로 하고 아르테미스 레스토랑을 나선다. 레스토랑 건너편 산 아래 구릉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가옥들과 과수원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오른쪽 나지막한 산비탈에 들어선 붉은 지붕에 흰색 회벽의 전통적인 지중해 연안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주택들이 눈부신 햇살 아래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낸다. 완만한 산기슭에 자리 잡은 예쁜 산간마을이다. 이곳으로 들어오는 도로는 셀주크에서 이어지는 도로 뿐인 것을 보니 우리로 치면 산간 오지 마을인 셈이다.
아르테미스 레스토랑은 셀주크에서 이어지는 도로 끝 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레스토랑으로 이 마을의 관문 구실을 하는 듯하다. 아마도 관광객들은 이곳에 들러 와인도 시음하고 더러는 구매도 하며, 우리 일행들이 그러했듯이 마을을 구경하러 레스토랑 정문을 나설 것이다. 중세 유럽의 거리처럼 돌이 촘촘히 박혀 있는 마을 거리를 따라 마을 구경에 나선다. 회색으로 칠해진 석축 위에 하늘색 화분이 줄지어 놓여있는 예쁜 집에 펜션과 레스토랑, 카페를 알리는 간판이 붙어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쉬린제의 추억을 남긴다. 마을 어귀 한 집의 흰색 담벼락을 이용한 포토존엔 쉬린제의 와인병으로 장식이 되어있다. 나무 판재를 쪼개 만든 포토존에는 Şirince Hatirasi mastika Mahzen (쉬린제 추억….)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간단한 마을의 역사, 오스만 어쩌고 저쩌고 적혀 있는 듯한데, 이곳의 주요 작물인 포도와 꽃나무를 심어 만든 포토존이다. 와인 병과 와인 잔을 그려 넣은 것도 잊지 않고 만들어진 이 마을을 상징하는 예쁜 포토존이다. (계속)
@thebcstory
#튀르키예 #셀주크 #쉬린제마을 #쉬린제와인 #와인 #여행 #세계여행 #여행에세이 #터키여행 #간디 #오스만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