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반디르마 (Bandirma)는 아직 붉은빛으로 가득하다. 새벽 6시의 창문 밖 야경이 너무 매혹적인 반디르마 거리를 따라 들어선 아파트는 대부분 아직 불이 켜지기 전이다. 어둠에 잠긴 거리엔 아주 가끔 차량들만 오간다. 도로를 오가는 차량이 적으니 자연히 소음도 많지 않은 조용한 도시와 붉은빛 조명이 찰떡궁합처럼 느껴진다. 눈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현란한 조명은 찾아볼 수 없다.
이른 시간임에도 이미 관광객을 태운 하얀색 버스가 호텔을 빠져나간다. 4시쯤 기상하여 아침식사를 마치고 6시에 출발하는 팀이지 싶다. 너무 빨리 나가는 것 아닌가? 짧은 일정으로 오거나 그리스까지 포함하는 패키지여행 상품으로 오면 대부분 4시 기상, 5시 식사, 6시 출발로 아침 시간이 엄청 바쁜 456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정일 것이다.
그렇게 두런두런 친구와 이야기하며 모닝커피와 함께 새벽 야경(?), 새벽과 야경(?) 두 낱말의 조합이 상당히 어색하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해가 늦게 뜨고 늦게 지는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지리적 환경 덕에 즐길 수 있는 호사다. 그렇게 우리네의 아침과는 사뭇 다른 이색적인 아침 풍경을 즐기는데, 6시 55분이 되자 어김없이 아잔이 울려 퍼진다. 미나렛 확성기를 통하여 도심으로 빠져나온 아잔 소리는 그렇게 경보 사이렌처럼 3분 40초 동안 계속 이어진다. 아직 어둠에 잠긴 도시를 집어삼킬 것처럼 큰 소리로 반디르마의 아침을 깨우는 아잔이다. 아마도 지금 이 시간 무슬림은 기도를 시작했을 것이다. 붉은빛에 잠긴 아침 야경을 즐기던 여행자도 아잔과 함께 행장을 꾸리며 오늘 일정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우리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8시에 호텔을 출발하는, 비교적 넉넉하고 여유 있는 일정으로 여행을 하는 셈이다. 필자가 아침 야경을 즐기는 6시에 이미 출발한 팀들이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오늘 부르사(Bursa)로 이동할 예정이다. 아침 하늘에 오랜만에 구름이 보인다. 구름 속에 가려진 채 떠오르는 아침 태양빛을 바라보는데, 묘하게 붉은 태양빛 사이로 어제 둘러본 에베소 고대 유적지 단상이 떠오른다. 1시간 30분가량 버스로 이동하여야 하기에 핸드폰을 꺼내 들고 떠오르는 생각들과 느낌을 메모한다.
에베소 고대 도시 유적지 단상
에베소 고대 도시 유적은 빈번한 세력과 문명의 충돌에 의한 전쟁과 대지진으로 파괴되고 땅속에 묻힌다. 과거 번영했던 영광스러운 도시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로마제국은 물론 이 도시에 둥지를 틀었던 여러 제국의 영광도 에베소가 무너진 것처럼 그렇게 무너졌다. 무덤까지 훼손되고 유물이 도굴되는, 그렇게 처참하게 짓밟힌 고대 도시 에베소는 15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에베소!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하면서 발전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 인생 또한 슬기롭던 슬기롭지 못했던 변화를 겪으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삶이 잠시 무너졌다고 두려움에 머무른다면 절대로 복원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 옛날 영광의 도시 에베소엔 비록 흩어진 돌무더기와 번영했던 흔적만 남아있지만, 그 흔적으로 에베소의 영광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 것이다.
오늘날 번영하는 주변의 도시들 한가운데 그렇게 상처처럼 남아 있는 에베소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은 어쩌면 지나온 과거의 아픈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다소 처연함마저 느껴지는 일이다. 돌보지 않으면 안 될 깊은 상처, 그저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이 오가지만, 그럼에도 적막감과 외로움만 느껴지는 그런 아픈 상처 같은 흔적만 남은 에베소이다. 수천 년간 수없이 많은 날 해가 뜨고 해가 지며 도시를 오갔을 에베소 사람들의 숨결이 유적으로나마 그렇게 느껴지는 에베소에서 아주 잠시지만 세월에 묻힌 나를 들추어낸다. 그렇게 어렵사리 들추어낸 나를 돌아보며 이곳에 남은 에베소 사람들의 삶의 흔적 속에서 돌같이 단단한 무심한 시간 속에 버려진 나를 주섬주섬 마음에 담아 떠난다.
필자를 포함하여 대부분 사람들은 늘 변화를 두려워한다. 현상 유지만이라도 하자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 싶다. 현재에 머물고 싶어 한다. 다가올 미래의 불확실함과 두려움 때문에 머무는 것은 종종 근거 없는 논리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쯤 지나 끔찍하게 망가지고 나서야 현상 유지가 아니었음을, 머무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오랜 세월 혼란과 침략, 재난으로 파괴가 되었던 에베소는 발굴되고 복원되어 조금이나마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머물고 현상유지로 망가진 삶도 제대로 발굴하여 복원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삶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싶다. 떠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머물고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은 머물다 보면 무너지는 것이다. 무너진 삶을 복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떠나는 것이다. 앞으로만 나아가는 삶보다 가끔은 뒤를 돌아보며 허물어진 부분을 복원하는 시간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 못지않게 분명히 필요한 삶의 자세다.
부르사 Bursa
필자의 튀르키예 여정은 이제 반디르마에서 마르마라 해변을 끼고 동쪽으로 달려 부르사 Bursa로 향한다. 1시간 남짓 달렸지 싶다. O-5번 도로상 부르사 인근 Oksijien Kuzey 휴게소에 잠시 쉬어 간다. Köftecim Sebahattin 레스토랑 간판이 걸려있는 휴게소이다. 09시 다시 부르사를 향하여 출발한다. 튀르키예 여행 중 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처음 본다. 마르마라 해엔 해무가 가득 내려앉았다. 약간의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틀리지 않을 모양이다.
아나톨리아 북서부 마르마라 해안가의 대도시 부르사는 튀르키예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부르사 주의 수부도시이다. 부르사는 1335~1363년 오스만 제국의 두 번째 수도로, 당시 페르시아어로 "tanrılardan armağan, 신의 선물"이라는 뜻에서 휘다벤디가르(Hüdavendigar)라고 하였는데, 최근엔 공원과 정원, 도시 주변의 다양한 숲과 녹지 조성으로 예실 부르사(Yeşil Bursa, 초록색 부르사)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도시이다. 과거에 미시아 올림포스산(Mysian은 아나톨리아 북서부 마르마라 해안의 고대 도시)으로 불렸던 울루산 (Ulu Dağı, 2543m)이 우뚝 솟아 일찍이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 초기 오스만 왕조의 술탄들의 마우솔레움(mausoleum, 죽은 위인이나 신격화된 인물의 영혼을 모시는 묘지, 영묘) 들과 오스만 건축물, 고고학 박물관 등이 오늘날 부르사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스켄데르 케밥(İskender kebap, 19세기말 이스켄데르 에펜디가 처음으로 만든 케밥)과 밤을 절여 만든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의 유명한 과자 마롱 글라세(Marron glacé)와 유사한 케스타네 셰케리 (kestane şekeri)가 유명한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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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 선사시대 인류의 정착지 을르프나르 회윅(Ilıpınar Höyüğü)은 기원전 5200년경의 정착지로 알려져 있다. 1326년 비잔티움 제국 영토였던 부르사를 오스만 제국이 점령했고, 이후에 부르사는 초기 오스만 제국의 주요 도시로 14세기 내내 번영을 이루었다. 후에, 1363년 오스만 제국은 동트라키아의 에디르네(Adrianople, 현재 튀르키예의 유럽 영토로 그리스와 불가리아 국경 인근 도시)를 정복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는다. 술탄 바예지드 1세(Bayezid 1.)는 부르사에 1390~1395년 바예지드 퀼리예시(종교 시설)와 1396~1400년에 부르사 울루 자미(Bursa Ulu Camii, 그랜드 모스크)를 건축한다. 부르사는 마호메트 2세가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지금의 이스탄불)를 정복할 때까지 오스만의 가장 중요한 행정 및 상업 중심지였으며,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건국되며 가장 산업화된 도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톱하네 공원 Tophane parki과 오스만 가지 Osman Gazi
09시 27분 부르사 톱하네 공원(Tophane Parki)에 당도한다.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된 Tophane Parki에서 과거에는 라마단 기간 동안 이프타르와 사후르(iftar ve sahur, 동트기 전의 식사 suhoor, 금식을 깨는 저녁 식사를 iftar라고 함.) 시간을 알리기 위해 이 대포를 발사했다고 한다. Tophane Parki에는 시계탑, Osman Gazi 및 Orhan Gazi 영묘와 과거 라마단 기간 동안 발사했던 대포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창시자인 오스만 가지(Osman Gazi)는 13 세기 후반에 등장한 많은 아나톨리아 공국(beyliks) 중 하나인 오스만 공국의 베이(Bey, 족장)였다. 당시 오스만 공국의 영토는 소아시아 북부의 비티니아(Bithynía), 지금의 튀르키예 북서부 마르마라 해, 보스포루스 해협 및 흑해에 인접해 있는 소아시아 내륙과 접해 있던 땅으로 약화된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기에 유리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었다. 결국 오스만 가지의 후대 술탄들은 비잔틴을 정복하고 지금의 부르사를 정복하며 제국의 기반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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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가지의 생애는 알려져 있는 기록이 없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고 어떤 이야기가 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오스만 가지의 생애는 그저 신화처럼 전해질뿐이다. 다만 그의 아버지 Ertuğrul이 토후국의 수도로 삼았던 Söğüt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되고 있으며, 아나톨리아 반도에 투르크 족의 출현은 13세기 초 중앙아시아 유목민이었던 오구즈 투르크 Oghuz Turkic 일족이 당시 럼 셀주크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하며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아버지 Ertuğrul 사후 베이로 집권한 오스만 가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콘야까지 주요 도로를 통제하며 방어에 유리한 고지대 소휘트 Söğüt(튀르키예 빌레치크 주(Bilecik İli)에 있는 소도시)를 중심으로 공국의 영토를 구축한다. 정치적으로도 beylik에 새로운 행정제도를 도입하며 비교적 강력한 공국으로 성장하는 통치력을 보여주고 또한, 서쪽의 비잔틴 땅과 동쪽의 몽골의 땅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와의 근접성을 잘 활용하여 전략적,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며 강대국으로의 성장 발판을 마련하기도 한다. 당시 오스만 베일릭은 비잔틴 지역과 인접한 유일한 이슬람권 기지였기에 몽골 세력을 피하고 경제적 이득과 종교적인 이유로 당시 아직 정복되지 않은 비잔틴 제국을 습격하여 새로운 땅을 확보하고자 하는 투르크족 사람들이 대거 오스만 베일릭으로 유입되고 먼 훗날 오스만 제국이 수립되는 가장 중요한 토대가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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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가지에 이어 아들 Orhan Gazi는 충성스러운 가신들을 중심으로 정예군 조직인 예니체리 부대를 양병하여 당시 내전으로 쇠퇴하여 가는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비잔틴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이때 조직된 예니체리는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과 오스만 제국의 광대한 영토 확장과 유지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오늘날 오스만 제국의 육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군사력의 기반이 된다. 1321년 오르한은 부르사와 마르마라 해 해안을 연결하는 무다냐 항구를 점령한다. 그리고 흑해 서쪽 연안과 코카엘리, 마르마라 해의 남동쪽 해안을 점령하기 위하여 예니체리 병력을 파병한 후 비잔틴 사령관을 설득하여 부르사를 점령한다. 부르사가 함락되자 오르한은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예니체리 기병을 보내 마르마라 해안의 비잔틴 마을을 모두 점령한다. İznik(고대 그리스 도시였던 니케아)와 니코메디아 (Nicomedia), 스쿠타리를 함락하며 오스만 제국은 1229년부터 14세기 초반까지 비잔틴과 그리스 영토를 차근차근 정복하여 전략적인 요충지를 확보하고 아나톨리아 북서부의 강자로 떠오른다. 오르한 가지가 정복한 İznik(니케아)의 상실은 비잔틴 제국과 산발적이지만 아나톨리아 반도에 남아 있었던 그리스 후계 국가의 최종적인 해체로 이어지며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성립과 확장이 시작되는 분수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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