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4일
오늘 하루는 아무런 사건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계획이라기엔 너무 느슨했고, 우연이라기엔 또 너무 잘 맞아떨어졌던 하루. 지나고 보니 모든 장면이 하나의 영화처럼 이어졌고, 나는 그 안에서 어딘가 꿈꾸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저녁 퇴근 후, 나는 누나를 데리러 갔다. 저번에 예약금을 걸어둔 대로, 우리는 예정된 만남처럼 조용히 서울로 향했다. 목적지는 누나가 좋아하는 종로에 있는 파스타 집 ‘파티나’. 통유리의 전경이 시원하게 보이는 조용한 식당에서, 누나는 메뉴판을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고,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웃었다. 누나는 와인을 마시고 싶다고 했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대신 마음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은 내가 준비한 코스가 있어.” 이후에 가려고 생각해 둔 와인바가 있었고, 나는 그 시간을 더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다.
파스타는 따뜻했고, 누나는 내 앞에 있었다. 사실 그거면 됐다. 누나와 마주 앉아 있는 저녁 식사.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충분했던 순간.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북악스카이웨이로 향했다. 팔각정에 도착해 나는 “여기 처음이지?” 하고 물었다.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 조금 설레었다. 예전 누나는, 북악스카이웨이는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라고 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야 한다고. 그 말이 떠올라 괜히 헛된 기대를 품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나도 그 말에 어울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차창 밖으로는 서울의 불빛이 조용히 흘렀다. 말없이 흘러가는 시간, 창밖의 바람, 그리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누나. 그게 전부였는데, 그게 전부라서 좋았다. 운전대를 잡은 손끝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을 잡고 싶을 때 나는 꼭 그렇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종로로 내려와, ‘가가바’라는 조용한 와인바에 앉았다. 조명은 어둡고 음악은 느렸으며, 그곳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이었다. 누나는 화이트 와인을 골랐고, 나는 그냥 누나가 와인을 마시는 모습을 오래오래 보고 싶었다. 우리 사이에 특별한 대화는 없었지만, 그 정적조차 풍성하게 느껴졌던 밤. 마치 오래전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어쩐지 낭만에 취해버렸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을 훌쩍 넘겼고,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가지 못한 채 역시나 내 차 안에서 함께 잠들었다. 서로 눕지도 못하고 목을 기댄 채 조용히 졸았던 그 시간. 창밖으로는 새벽 공기가 살짝 서늘하게 흘렀고, 차 안은 아주 잠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이 됐다. 내가 누나를 바라봤는지, 누나가 나를 바라봤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숨소리와 작은 움직임, 그리고 바스락거리는 정적 속에서 무언가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던 것이 있었다.
새벽 3시 즈음 나는 누나를 집에 데려다줬다. 그 순간의 공기도, 거리에 쌓여있던 노란빛도 이상할 만큼 예뻤다. 돌아오는 길은 혼자였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하루의 장면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되감기처럼 흘렀다.
오늘이 꼭 연인들의 데이트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나는 그런 마음이었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조심스러웠지만, 사랑이고 싶었던 마음. 누나가 예뻐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오늘 하루가 나에게는 기적 같았다.
가가바의 잔잔한 와인 향, 북악스카이웨이의 조용한 곡선, 그리고 차 안에서 나란히 잠든 그 새벽의 공기까지.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영화처럼 다가왔다.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그냥, 참 예쁜 하루였다. 아주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