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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란 Oct 20. 2023

무한리필 단무지 20대

수능이 끝나고 성인이 되고 나서 주민등록증을 제시하며 술집에 입장했던 그 짜릿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 예전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술집을 아무런 방해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수업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갑작스런 질문을 받아도 육하원칙으로 정확하게 대답해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처음 가보게 된 술집. 오뎅이 하나에 천 원, 소주는 삼천 원. 돈이 없던 나와 친구들은 소주 한 병당 오뎅 한 개가 할당량이었다. 그리고 무제한으로 주던, 레몬즙을 살짝 뿌린 단무지와 오뎅국물을 끝으로 더 이상의 돈이 드는 안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소주 한 잔에 오뎅을 바라보며 단무지만 씹던 자린고비 같은 시절. 그 술집에 자주 가던 우리에게 사장님은 가끔 말린 오징어를 하나씩 주곤 했다. 간장에 마요네즈와 청양고추를 섞은 소스에 오징어를 찍어 먹으면 푸른 해풍에 말린 오징어의 결이 느껴지면서 한잔을 부르는 감칠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소주 한 병을 더 유도하는 사장님의 고도의 전략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안쓰러웠던 건지, 가끔씩이라도 안주 한 개쯤은 시켜먹으라는 무언의 압박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눈치라고는 없었던 우리는 네 명이서 진득하게 마셔도 총 삼만 원 정도 나오는 기적을 보여주곤 했다. 그래서 ‘소주 한잔하자!’는 오늘 술 먹자는 의미였음에도 우리는 정말 소주 한 병값이었던 삼천 원만 가지고 나갔었다.     

가끔은 동네에서 같이 운동하던 형을 그 술집에서 만나곤 했다. 어느 날 밥은 먹었냐면서 우리에게 보급된, 일 인당 한 개라서 더욱 의미가 있었던 우동이 떠오른다. 우리는 그 형의 인자함을 그때까지 몰랐었는데 한순간에 호감도 1위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술집에서 그 형을 만나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우리에게 큰 위기가 다가왔다. 바로 군대였다.


예전엔 우리가 앉으면 꽉 찼던 자리였는데, 한 명씩 군대를 갈 때마다 빈자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공익이었던 친구 한 명이 마지막 자리를 지켰고 2년 뒤에 한 명씩 다시 복귀해 자리를 채웠다.


다시 예전처럼 재밌게 놀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낙천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아무런 고민 없이 즐거운 얘기가 오갔던 그 자리에서 불안한 미래에 대한 각자의 고민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는 그런 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친구들의 고민이 하나씩 해결될 때마다 하나둘 각자의 삶을 위해 자연스럽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날이면 날마다 보진 못하지만 우리는 가끔 주둔지였던 그 술집에 가곤 한다. 자리에 앉는 순간 여전히 시큼한 단무지와 짭조름한 오뎅국물이 주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 곳에 오면 한 친구는 그럴싸한 음식들을 여러 개 주문한다.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다 먹지도 못 할걸 왜 이렇게 많이 주문하냐고 말했다. 친구는 “어렸을 적에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 먹고 싶어도 먹지 못했던 기억 때문에 일부러 많이 시킨다.” 라고 대답했다. 상황이 달라진 만큼 현재는 서로의 사회생활과 현실적인 얘기들이 오가지만 가끔은 다음 날도 아무 걱정 없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술만 먹으면 나무에 올라가던 친구.

술만 먹으면 바닥에 피자를 만드는 친구.

술만 먹으면 공기가 좋아서 안 취한다던 친구.


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또 잊은 게 있다.

내일 출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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