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가위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시카고 다운타운
미국에 온 후로 지금까지 두 명의 손님을 맞이했다. 한 명은 20년 가까운 직장생활을 통해 가장 친하게 지낸 오랜 친구이며, 다른 한 명은 한국에 계시는 장인어른이다. 막상 서울에 사는 사람도 남산타워, 경복궁 잘 안 가는 거처럼, 막상 시카고 랜드(북쪽 서버브)에 산다고 시카고 다운타운에는 손에 꼽을 정도로 가게 되는 게 현실이다. 차로 40~50분 정도면 가는 거리지만, 도심에서 주차할 생각, 해지기 전에는 돌아와야 한다는 압박감(시카고 다운타운은 밤에는 다소 위험해지는 곳이다) 때문인지 좀처럼 가지 않게 되었다. 이번에 손님이 온 덕분에 나도 다운타운을 속속들이 다녀볼 기회가 있었는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시카고에 온다면 꼭 한번 해야 하는 액티비티는 바로 미시간 호수를 배를 타고 다니면서 다양한 건축물을 볼 수 있는 'Architect Boat Tour'이다. 시카고는 건축 디자인으로 유명한 도시 중의 하나인데, 다양한 매력을 지닌 고층 건물들
각각의 그 역사와 건축 디자인에 대해서 가이드가 속사포 영어로 설명해 준다. 어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시는지 중간중간 섞는 농담과(100% 이해는 안되지만) 표정 연기 등이 보는 재미를 더 해 주었다. 옥수수 모양을 한 빌딩, 오로지 철제와 유리로만 건축되었다는 건물(그게 가능한가?), 샴페인 병 모양을 모티브로 디자인된 빌딩 등 정말 그냥 지나쳤으면 몰랐을 다양한 뒷 이야기들이 더해지니 훨씬 흥미로웠다. 어떤 빌딩 펜트하우스에는 스코티 피펜이 살았고 저기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부인이 살았더라는 등의 가십은 덤이다.
시카고 하면 사람들이 대부분 떠올리는 건 첫 번째가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불스, 그다음은 바로 시카고 피자일 것이다. 요즘엔 한국에도 종종 시카고 피자 전문점들을 볼 수 있는데, 시카고 피자는 일반 피자의 3~4배 이상 두꺼운 그 압도적 비주얼을 자랑한다. 시카고 피자의 원조로는 'Giordano'와 'UNO'가 유명한데, 지오다노는 프랜차이즈화 되어 전국에 수십여 개 매장이 있으니 희소성이 좀 떨어졌다. 우리는 무언가 더 오리지널리티를 느껴보기 위해 일부러 우노의 1호점을 찾았다. 두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가 각각 갈리는데, UNO에는 오히려 다양한 야채가 토핑 되어 있어서 우리가 아는 그 시카고 피자와는 살짝 다른 느낌이다. 한국에 흔히 알려진 시카고 피자 맛은 지오다노에 가깝다.
시카고에는 100년이 넘은 지하철인 CTA가 있는데, 여전히 도심지 중심에서나 도심 인근 동네로 많은 사람들의 발이 되어주고 있다. 특이한 점은 바로 이 지하철이 지하가 아닌 건물 위 지상으로 다닌 다는 점이다. 건물 약 2~3층 높이에서 다니다 보니 저녁 시간에는 언뜻 홍콩의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어두워진 시카고 도심의 밤을 무심하게 지나가는 CTA를 보니 예전 왕가위 감독의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상당히 낡기도 했고, 야간에는 이러저러한 범죄들도 많아서 낮에만 잠깐 타보고 말았다. 세계 1위 수준의 경제 대국인 미국의 대중교통이 이렇게 낙후된 이유가 자동차 회사의 로비로 인한 결과라고 하니, 참 알다가도 모를 나라인 거 같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도심에 전차도 다니고, 대중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었는데, 당시 포드, GM 등의 자동차 회사들의 로비로(자동차를 더 많이 팔아먹게 다는 야망으로) 전차를 모두 없애고 차도로 변경했다고 하며, 그 이후로 대중교통에 대한 투자가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도 밀레니엄 파크에 있는 큰 콩알 모양의 구조물인 'The Bean'이나 배트맨의 배경으로 알려진 도시답게 운치 있는 야경을 볼 수 있는 '360 Chicago' (존 핸콕 타워로 더 알려진) 등 주요 관광 포인트들도 가 볼 수 있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갈색 벽돌 기반에 담쟁이덩굴이 남아 있는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 리글리필즈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기도 하였다. 오래되어 낡기도 했지만 무언가 클래식한 매력이 돋보이는 야구장이었다.
매일매일 일정을 짜서 열심히 돌아다니긴 했지만, 사실 관광이 중심은 아니었다. 그동안 타지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던 나에게 지인의 방문은 그 자체 만으로도 큰 기쁨이 되어주었다. 오롯이 내 편에 서서 내 얘기를 들어주고 이해해 주려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란 정말이지 꿈 만 같은 시간들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