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설) 흩어진 사람들

임진이북 재재호지

by Peregrine

1937년


황해도 벽성군 가좌면은 대대로 해주 오 씨의 집성촌으로 서로가 잘 아는 종친들이었다. 기호지방의 일부로 조선시대부터 정감록 예언이나 천주교 사상이 조심스럽게 스며든 고장이었다. 토정가장결에는 푸른 옷과 흰옷이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침략해 온다고 하였다. 지나고 보니 서양과 일본의 개방 압력에 대한 예언이려니 하였다. 정감록에는 계해년에 정 씨 성을 가진 진인이 남쪽에서 나오고 도읍을 화산에 정하면 백성이 세금과 부역을 면하고, 그 환호의 깃발이 길을 덮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진인이 정 씨이던 아니면 다른 누구이던 이 어려운 세상에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 준다면, 그의 세상을 기다려봄직 하지 않은가? 암암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예언은 그 진인이 이 씨가 아니므로 표면에 드러내고 맞이한다면 무시무시한 역모가 되었을 것이다. 천주님을 마음 놓고 기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는 정 씨가 나타나 세상살이가 수월해지고 멀찍이는 천주님이 오셔서 천국이 열린다면 이 각박한 삶도 견뎌볼 만하리라. 실망스럽게도 진인이 나타나야 할 시기임에도 기어코 나타나지 않았고, 조선은 망하고 왜구가 쳐들어왔다. 구원이 아니라 침략이었으며,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한계에 다다를 만큼 내몰리고 있었다.


1937년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물자가 부족해지자, 조선총독부에서는 가가호호 방문하여 우리가 농사지은 쌀을 집안 곳곳을 뒤져 모두 가져가고 대신 대두박 (콩)을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거두어간 쌀의 양과 비슷하거나 좀 더 적은 양으로 치러준 대두박은 돌과 뒤섞여 있었다. 키질을 하여 돌을 걸러내고 나면, 그 양은 훨씬 줄어들었고 대두박 역시 형편없는 것이었다. 공출은 농사를 지은 곡물뿐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쇠붙이를 모으느라 농사짓는데 없어서는 안 될 농기구도 앗아가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총독부가 강압적으로 젊은 사람들을 군대나 공장에 끌고 가는 일이 잦아졌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온 가족이 배불리 먹을 수도 없고, 언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1939년

새해 설날을 맞이하고 며칠이 지나서, 수호할아버지는 수호아버지와 집안 식구들의 사주를 넣어 모두의 한해운수를 토정비결에서 풀이해서 해석이 맞는지 집안어른에게 조언을 구하고 돌아왔다. 덕담과 더불어 정감록 예언이 더해졌다. 정감록은 해주 오 씨 집성촌 내에서도 학식이 높은 수표 외할아버지만이 풀이가 가능하였는데, 임진강 이북은 재재호지 (臨進以北再在胡地)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즉, 임진강 이북에는 향후 두 차례 호적이 쳐들어와 화를 맞이하는 전쟁터가 된다고 하였다.


듣고 있던 수호할머니 평산댁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러면 어쩐데요? 가만히 앉아서 화를 당할 수도 없는 일이고?”


“아니 근데 강원도 인제는 병란이나 흉년을 비껴갈 피난처라는 게야. 전국에 있는 십승지지 (十勝之地) 중 하나인 길지 (吉地)로 꼽히고 여기서는 그래도 제일 가깝기도 하고…”수호할아버지가 답하였다.


“그럼 어떻게 피난을 가야 하는 게야?”수호할머니가 나섰다.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인지 모르니까 문제지. 올해 아니면 내년인지? 아니 한 10년 뒤의 일인가?” 수호할아버지 말에 모두 조용해졌다.


“그럼,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화를 피한답시고 지금 당장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구만. 살던 곳을 떠나는 건 뭐 쉽고, 가면 누가 반겨준다고?” 수호할머니의 올곧은 한마디에 댓 구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2년여 지나면서 공출은 더욱 악랄해지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앞으로 두 번의 화를 맞이한다는 예언은 마음 한구석에 불안을 키우기에 충분하였다.


수호할아버지와 수호아버지는 마을의 여러 어른들과 상의하고, 중대 결단을 내렸다. 봄이 되어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고향 황해도 가좌를 떠나 강원도 산골로 피난을 가기로 하였다. 수호의 나이는 여덟 살이었고, 네 살 터울인 여동생 정이는 네 살이었다. 수호의 손위 누이인 정애는 이미 출가한 몸이었다.


강원도 인제군 황태산 아래는 계곡이 흐르고 그 맞은편 맹현봉에는 무려 110여 호의 사람들이 비슷한 이유로 모여 살았다.


수호할아버지와 수호아버지는 농사를 지을 땅에는 돌을 골라내고 불을 놓아 밭을 만들었다. 가족들이 살 집도 지었다. 강원도이지만, 황해도 가옥구조로 집을 지었다. 황해도는 평야라 바람이 많이 불고 추위가 제법 매서운 곳이어서 ‘ㅁ’ 자형 가옥구조가 많았는데, 산에 둘러싸여 평지가 아닌 맹현봉에서 황해도 가옥구조로 짓느라 땅을 고르게 펴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운데 마당에는 우물을 파고, 안방, 건넌방, 사랑방, 외양간, 화장실이 집안을 쭉 둘러싸고 있었다. 겨울에 눈이 오고 바람이 매섭게 불어도 방들로 둘러싸인 마당에 들어서면 바람도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1940년대 황해도식 ‘ㅁ’자형 초가.png




1941년

맹현봉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차디찬 물을 가득 담은 계곡을 끼고 있어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였다. 세상 밖과 고립되고자 한다면 이보다 안성맞춤은 없을 것이다. 교육도 세상과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맹현봉에는 매현국민학교 분교가 있어서 국민학교 2학년 과정까지는 동네에서 마칠 수 있었다. 3학년부터는 20리 길을 걸어 매현국민학교까지 가야 했으나, 어린아이들이 그 먼 산길을 다니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위험하여 학업을 지속하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특히 수호는 2대 독자여서 수호부모님은 장거리 학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주 오 씨 종친인 수교의 외할아버지가 서당을 열었다. 서당에 모인 아이들은 스무 명 남짓 되었다. 나이와 학문의 수준에 따라서 천자문, 동몽선습, 사서삼경 등을 배우는데 한자를 읽고, 뜻을 이해하고, 먹을 갈아서 한자 쓰기를 하였다. 매달 말에는 한 사람씩 방에 들어가서 훈장님을 등지고 벽을 바라보고 앉아서 한 달 동안 배운 것을 모두 외웠다. 수호도 매일 배운 것을 소리 내어 읽고 써 본 것을 시험 치르는 날에 흐름이 끊기지 않게 첫 자들을 리듬에 붙여 외워둔 것을 손가락으로 접어가며 한자문장들을 읊어 내려갔다. 연습할 때 하던 대로 혼자 자기 리듬에 고개를 왼쪽으로 끄떡거리며 외워나가자, 뒤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훈장도 헛웃음이 나왔다.




수호가 한자외우기를 모두 마치고 돌아앉아 마주 보니, 훈장이 물었다.

“공곡전성 허당습청 (空谷傳聲 虛堂習聽)의 뜻을 말해 보아라.”


“빌 공 (空), 굴 곡 (谷), 전할 전 (傳), 소리 성 (聲), 빌 허 (虛), 집 당 (堂), 익힐 습 (習), 들을 청 (聽)!


“공곡에 전성하고 허당에 습청하니, 텅 빈 골짜기에서도 소리는 전해지고 빈 대청에서도 소리는 들린다입니다. ‘역경’에 이르기를 군자가 집안에서 하는 말이 훌륭하면 천 리밖에서도 따르게 마련이니, 집안에서 하는 말이 훌륭하지 못하면 천리 밖에서도 어기게 마련이니, 언제나 올바른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호와 훈장의 이런 대거리가 여러 차례 이어졌다.


“잘했다. 중시조가 났구나! 달거리는 되었다, 나가봐라.”훈장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수호는 방을 나섰다. 마음이 날아 갈듯이 홀가분 해졌다. 한 달 동안 배운 내용을 이렇게 훈장 앞에서 외우고 나면, 그다음 날은 서당공부가 없었다.




수호는 신이 나서 서당을 빠져나와 계곡으로 갔다. 서당에서 먼저 달거리를 치르고 온 정수와 한동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옷을 벗어 바위에 올려놓고 시원한 계곡물에 들어갔다. 물은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가웠지만 그만큼 개운하기도 하였다. 수호는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어가며 더 깊은 곳으로 헤엄쳐 나아갔다.


아이들이 물에서 나와서 옷을 놓아둔 바위로 향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지만, 바람이 불어오자 수호의 젖은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바위에 대충 걸어 놓았던 옷을 급히 주워 입고, 아이들과 마른 장작을 모아다가 반듯한 바닥에 불을 피웠다. 모닥불에 둘러앉아서 몸을 녹이며 불을 바라보았다. 불에 몸이 서서히 녹아내리자, 점심때가 훨씬 지난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배고프다. 불도 좋은데 뭐 구워 먹을까?”한동이가 입을 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수호나 정수도 역시 출출한 참이었다.


“내가 감자 가져올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정수가 일어서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가. 네가 불 꺼지지 않게 잘 봐!”수호는 한동이에게 말하고 정수를 따라나서며 일어섰다.

얼마 뒤, 검게 그을은 뜨거운 감자를 이손 저손으로 옮겨가며 바쁘게 손놀림을 하였지만 껍질은 듬성듬성 까졌을 뿐인데 얼굴은 이미 검은 숱으로 뒤덤벅이 되었다. 아직 덜 익은 뜨거운 감자를 깨무는 순간 이에 박히면서 입천장을 데었지만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벌려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면서도 씹는 것을 늦추지는 않았다. 구운 감자에서는 은근한 단맛도 전해졌다.




늘 기침을 하고는 가쁜 숨을 쉬던 훈장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서당에 갔다가 일찍 파하는 날이 잦아졌다. 급기야 아이들을 가르칠 기력이 없어서 서당은 문을 닫았다. 수호가 서당에 다닌 지 2년 반 정도 되었다. 자연스레 동네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은 흐지부지 되었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1화(소설) 흩어진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