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말
“처음”이라는 단어는 참 설레고 두근거리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때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말이 되기도 했다. 나에게는 그날이 그랬다.
유난히 예민하고 민감한 성향인 첫째는 엄마를 구분하는 것이 인지적으로 가능한지조차 알 수 없을 때부터 엄마를 찾았다. 어쩌면 그것은 살기 위한 아이의 본능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엄마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살 냄새와 피부에 닿는 원초적인 교류만으로 그리고 자신의 생명 연장을 위한 젖을 물기 위해 본능적으로 제 엄마를 구분하는 것이다. 더구나 태생이 예민한 아이라면 그 본능은 몇 배가 된다.
이런 아이를 엄마가 돌보는 것은 우리 부부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내가 아이를 안아 트림시킬 때를 제외하곤 아이는 늘 엄마와 일심동체가 되었다. 그렇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이유식과 분유를 먹기 시작하자 약간의 변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변화에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자유부인” 일명 ‘자부’라고 불리는 그것이 나에게 왔다. 진작부터 아내에게 혼자만의 시간과 쉼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가 잠들 때야 비로소 홀로 시간을 가질 수 있던 아내지만 그 시간마저도 온전한 쉼을 누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이의 의식주를 아빠가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게 되면서 아내는 내심 온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눈치였고 나 역시 그간에 아내의 고생을 잘 알기에 때가 되면 아내를 이 창살 없는 감옥에서 탈출시켜 주리라 다짐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막상 그날을 마주하니 참으로 긴장되고 걱정된다. 자신이 없는 동안 아이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비하는 아내보다 오히려 내가 더 긴장해서 이것저것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점검하고 또 점검하게 된다. 평소 하지도 않던 메모를 잔뜩 해서 냉장고에 붙여 놓고 유사시를 대비한 각종 놀이 방법 등을 검색하고 준비해야 했다. 이건 마치 긴박한 전쟁터에 투입되는 이등병의 마음과도 같았다.
어느새 여유 있게 외출을 준비하는 아내와 달리 나는 시종일관 분주하고 정신없는 긴장의 시간이었다.
아이가 오전 잠을 청하자 아내는 살며시 집을 나섰다. 문 닫는 소리조차 나지 않게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 같이 그렇게 안개가 사라지듯 외출했다.
나는 아이가 이대로 쭉 자기를 바랐다. 아주 간절하게... 아니 최소한 오전 시간만이라도...
하지만 하늘에 내 간절함이 닿기도 전에 아이는 잠에서 깨어났고 여지없이 엄마를 찾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만큼 정신을 차릴 수조차 없던 혼돈의 시간이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분유와 이유식을 먹으며 아이는 점차 진정되었고 나도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감정 시계와는 달리 현실의 시간은 이제서야 막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내에게 언제 오는 거냐고 연락하고 싶었지만 한창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괜스레 부담을 줄까 들었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제 나의 고민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남은 4시간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로 모아졌다. 머릿속을 바쁘게 굴려 나름의 4시간 계획을 짜고 실행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기띠를 하고 산책을 나갔다. 품에 안은 아이의 기분과는 별개로 문을 나서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집 앞 커피집을 찾아 시원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해 손에 들고 아파트 단지 안을 천천히 걸었다. 그 순간은 마치 온 세상이 평화와 행복만으로 가득 채워진 듯했다.
아! 이래서 아내가 매일 그렇게 몸이 고단해도 아이를 안고 밖을 나서야만 했구나. 아내에게 커피 쿠폰이라도 주기적으로 보내주어야겠다.
그렇게 짧은 행복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와 침대에서 뒹굴며 놀아주었고 아이는 낮잠에 들었다. 그리고 낮잠에서 깨어날 때쯤 ‘삑! 삑삑삑삑’ 현관 도어의 비밀번호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이렇게 반갑고 고맙게 들릴 줄이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내는 날개만 없었지 마치 나를 구원하러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아이가 5살이 된 요즘에는 둘이 외출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어떤 날은 내가 먼저 아이에게 나가자고 하는 날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익숙한 일들이 ‘처음’이라는 것 앞에서는 왜 그렇게 두렵고 긴장이 되는지 어쩌면 아이를 키우며 아이와 함께 만나는 매일이 처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것은 그 처음을 좀 더 의연하게 마주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겼다는 것일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