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는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09년 한창 신종플루가 유행하던 시기의 기억이다. 지금의 코로나처럼 몇 년간 계속되고 일상을 마비시킨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시의 신종플루도 꽤나 막강하게 일상을 침투했다. 집단 생활인 군대는 특히 전염병에 취약하기에 모든 부대는 집단적으로 방어에 나섰고 우리 부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외부 유입 차단을 위해 주말 외출, 외박이 통제되었고 곧 피치 못할 경우를 제외한 휴가까지 통제되었다. 이미 감염된 인원들은 따로 공간을 마련해 격리하여 치료에 매진하도록 하였고, 고열자 생활관도 마련해 신종플루의 특징 중 하나인 고열을 앓고 있는 인원들을 따로 격리 조치하며 상황을 살폈다. 당직근무자는 저녁 점호 시 모든 생활관 인원들의 체온 상태를 확인하였고, 마스크를 항시 착용하고 손 소독제를 곧곧에 비치해두어 위생을 생활화하도록 했다. 지휘통제실 아침 상황회의 간 주요 점검사항은 각 중대별 고열자 현황 및 고열자 격리 생활관 상황이었다.
당시는 2022년 지금처럼 KF94 마스크가 보편적일 때도 아니고 마스크의 수량이 부족했으므로 구할 수 있었던 종류의 마스크를 구해서 항시 착용하며 지냈으며, 다행히 탄약부대였던 우리는 작업용 마스크가 있었기에 마스크 부족 사태까지는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마스크를 착용한 채 작업하고, 회의하며 부대 내에서 항시 마스크를 생활화했다. 다행히 감염된 몇몇 인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괜찮았고, 그들 또한 격리 조치해서 신속한 치료를 행했으므로 신종플루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었으나 정말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심각한 사기저하였다. 외출 외박이 통제당하고 모두가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휴가 또한 제한되니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거운 공기가 부대 곳곳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그런 상황에서 인원들을 다독이며 이끌어 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니 당연했다. 늘 통제된 상태에서 지내야 했던 군 생활 가운데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고 바깥공기도 쐬는 외출 외박이 있기에 견디기 한층 쉬웠을 텐데 그것이 통제되니 그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충분히 이해되기에 사기가 저하된 모습을 질책할 수 없었다. 당시 영외 숙소에 거주하던 나는 출퇴근을 하며 지냈으나 방침에 따라 생필품 구매, 병원 이용 정도의 꼭 필요한 외출을 제외한 외부 활동을 최소화하며 지냈고 아침마다 출근하며 체온을 측정했다.
휴가 또한 마찬가지였다. 포상휴가는 모두 제한되고 상을 당했을 경우 등의 예외상황을 제외한 휴가가 허용되는 경우는 소위 말년휴가라 불리는 3년 차 정기휴가 하나였다. 당시 병사들의 군생활에는 총 3번의 9박 10일의 정기 휴가가 주어지는데 전역을 앞둔 인원들의 3년 차 정기 휴가만 허용되었고 나머지 인원들의 정기휴가는 연기되어야 했다. 그리고 3년 차 정기 휴가자들은 휴가 일정을 조율해서 휴가를 보내고 전역 전날 복귀하도록 되었고, 격리 생활관에서 하루 지낸 후 다음날 전역신고 후 바로 부대를 떠나게 되었다. 평소에는 부대장님이신 창장님께 전역신고를 하도록 되어있었지만 전역신고는 중대 차원에서 마무리 짓는 것으로 되었다. 감염을 우려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동안 함께했던 동료들과 인사도 못하고 부대를 떠나게 된 부분은 많이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신종플루는 치료약인 타미플루의 보급으로 조금씩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한두 알 정도로 부대에 극 소수의 양이 보급되었지만, 점차 효과를 인정받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며 전 부대가 다 사용할 수 있게 충분한 양의 타미플루가 보급되며 마침내 신종플루의 시기는 끝을 맞이했다. 그리고 약간의 상흔을 남겼지만 비교적 무난하게 일상은 곧 제자리를 찾았다.
아직도 언제 끝일 지모를 코로나 가운데 있으며 문득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봤다. 부디 이 시간이 무사히 지나가고 잃었던 일상을 되찾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