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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번 노선:알프레이드 병원과 가족의 이야기

by Ding 맬번니언 Mar 02. 2025

오늘도 저는 72번 노선을 따라 트램을 운전하며 멜버른의 거리 곳곳을 지나쳤습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알프레드 병원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알프레드 병원은 멜버른에서 가장 큰 국립병원 중 하나로, 특히 노인 승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입니다. 병원을 찾는 분들이 많다 보니, 저는 자연스럽게 이곳을 지날 때면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알프레드 병원(The Alfred Hospital)은 단순한 종합병원이 아닙니다. 멜버른에서 응급 의료와 중환자 치료로 유명한 병원으로, 크고 작은 사고나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트램 운전을 하면서 병원 앞을 지날 때면, 저마다 사연을 가진 승객들이 이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자주 마주합니다. 누군가는 치료를 받기 위해, 또 누군가는 병문안을 위해 병원을 찾겠죠. 그래서 저는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조금 더 세심하게 승객들을 배려하게 됩니다.


트램이 병원 앞 정류장에 멈추면,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향합니다. 저는 언제나 그분들이 안전하게 하차하실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정적으로 움직이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반대로 트램에 오르는 분들이 있으면, 서둘러 자리에 앉을 시간을 드린 후에야 출발합니다. 알프레드 병원 앞은 단순히 한 정거장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순간이 담긴 장소라는 걸 알기에 더욱 신중하게 운행합니다.


그렇게 평소처럼 운행을 이어가던 어느 날, 종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스티븐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시간이 되면 연락 좀 줄 수 있겠어?" 짧은 문장이었지만, 평소와 달리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고, 스티븐의 목소리 너머로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지금 알프레드 병원으로 이송됐어."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 병원 앞을 지나칠 때 보았던 응급차들이 떠올랐고, 혹시 그중 한 대에 스티븐의 아버지가 타고 계셨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금까지도 익숙하게 바라보던 병원이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트램 운행을 계속해야 했기에, 감정을 다잡고 평소처럼 침착하게 운전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은 복잡했습니다. 승객들에게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겠지만, 제게는 달랐습니다. 이 병원이 단순히 지나치는 장소가 아니라, 오늘은 우리 가족에게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했습니다.


하루의 운행을 마치자마자 곧장 집으로 향했고, 다음 날에는 직접 알프레드 병원을 찾았습니다. 병원 정문 앞에 섰을 때, 매일 이곳을 지나쳤던 수많은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매일 같은 길을 지나왔지만, 이렇게 직접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평소엔 그저 도시의 한 부분처럼 보였던 이곳이, 이제는 가족을 걱정하며 방문해야 하는 공간이 된 것입니다.


스티븐과 함께 병실로 들어가는 길, 저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병원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는 것을. 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단순히 치료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걱정하고, 함께 있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을 것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알프레드 병원을 지날 때마다 더욱 따뜻한 마음으로 승객들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도 이곳을 지나는 승객들에게 신경을 썼지만, 이제는 한 걸음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을 향하는 모든 승객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그들의 하루도 저처럼 갑작스럽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트램이 병원 정류장에 설 때마다, 승객들이 한결 더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작은 배려라도 실천하고 싶어 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 무사히 끝나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감사해야 할 순간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평범한 일상의 반복, 그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걸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이제 알프레드 병원은 저에게 단순한 정류장이 아닙니다. 매일 같은 길을 지나더라도, 이제는 그 길 위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떠올리고,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기게 해주는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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