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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거나 신용불량자 되는 건 아니잖아요

by Ding 맬번니언

“죽거나 신용불량자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신경질적으로 엄마에게 내 속마음을 쏟아냈다.
엄마, 그만 읽어요."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혼자가 되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 나도 변했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변할 것이다.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고, 삶은 그 시간 위를 무심히 지나간다.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에 있었지만, 결국엔 사라지는 존재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 진지해야 한다. 나는 한때, 한국의 가족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너무 절실해서, 내 성 정체성마저 숨기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게 했다. 나는 게이였지만 여자친구도 사귀었고, 결혼도 생각했다. 그것이 ‘정상’이라 믿었고, ‘가족을 위한 사랑’이라 포장했다. 20대의 나는 그렇게 한국 가족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그 사랑이 너무 커서 내 존재를 억누르는 줄도 몰랐다.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무거운 사랑의 껍질을 깨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호주에서의 삶이었다. 낯선 땅에서 낯설게 시작했던 삶은, 오히려 나를 더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했고, 받아들였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선택한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 피가 아니라 마음으로 맺어진 가족. 나를 이해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이들과 함께 한다. 그렇게 19년이 흘렀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한 가지를 배웠는데 결국 끝까지 남는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지금 막 자신의 정체성을 마주한 이들에게 바치고 싶다. 무서울 것이다. 지금껏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게이라는 정체성으로, 당신을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절망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혼자가 아니다. 세상엔 이미 수많은 게이가 당신과 비슷한 길을 걸었고, 그 경험을 나누며 당신의 손을 잡아주려 한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 자신을 믿고 자신을 위해서 살자. 그럼 행복해지는 날이 분명히 온다.


나는 20대에 결코 순탄한 길을 걸은 게이의 삶을 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한국의 가족을 기준으로 그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나답게 사는 삶을 택하면서부터, 나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한때 스스로를 '망한 인생'이라 부르던 사람이었다.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나는 실패했다고,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 그렇게 다음 생에 행복하자 했다.


하지만 지금, 마흔다섯의 나는 매일이 행복하다. 어제보다 오늘을 더 사랑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을 더 담담히 맞이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나답게 살고 있다. 그래서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더는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만큼 나는 진심으로 살고 있고,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이제는 나를 사랑한다.

최근, 엄마가 작은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셨다. 누나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은 듯했다. 그 말속에는 염려도, 안타까움도, 어쩌면 작은 죄책감도 함께 실려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하면서도, 갑자기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말이 툭, 튀어나왔다.

“죽거나 신용불량자 되는 건 아니잖아.”

그 말에는 걱정과 체념, 분노와 피로가 한데 섞여 있었다. 어릴 적부터 반복되던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무게’에 나는 점점 숨이 막혀왔다. 이제는 나도 버겁다,라는 외침이 그런 말로 나왔던 것이다.

"그만 읽어줘."
나는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작은누나로부터 받은 문자 메시지를 그만 읽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서로를 너무 걱정하고, 너무 기대며 살아온 우리가 이제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엄마도, 누나들도, 나도.


그리고 나는 내 아들 ‘행복’이에게도 그렇게 가르칠 것이다.


자신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고.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그때 타인을 돌아보라고. 사랑은 희생이 아닌 선택이어야 하며, 진짜 사랑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길 때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이제, 누군가를 위해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를 먼저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돌보는 방식으로,
내가 무너지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줄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나누어진 섬이지만, 바다 아래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섬의 빛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각자의 불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여유가 있을 때, 우리는 그 불빛을 다른 사람에게 조금 나누어 줄 수 있다.


한 줄기 온기로, 한마디 위로로, 혹은 가만히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 그러나 그 불빛을 모두 내어주어, 내 섬이 어두워지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누군가를 위해 내 모든 불빛을 내어주고, 남은 건 한없이 어두운 나의 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누군가를 아끼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나의 불빛을 지킨다.

그리고 그것이 충분히 밝을 때, 누군가의 길을 잠시라도 밝혀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삶의 균형을 배우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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