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가 토요일마다 테니스 경기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코트 위에 서 있는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참가 인원은 대략 열 명,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순위가 눈에 그려졌다. 행복이는 늘 4등이나 5등 정도였다. 억지로 올려 잡지도, 괜히 낮춰 보지도 않으려 애쓰며 가능한 한 객관적인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려 한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상위 다섯 명과 하위 다섯 명의 실력 차이는 분명했다. 서브 속도와 공을 읽는 눈, 발의 움직임, 실수를 하고 난 뒤 무너지는 정도까지, 아이들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뚜렷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시작되고 점수가 오르내리는 순간만 되면 마음은 금세 이성을 앞질러 달리기 시작한다. 점수판에 찍힌 숫자는 분명한데, ‘이번만큼은 우리 아이가 이겼으면’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상대 아이의 실수가 나오길 바라지 않으면서도, 막상 더블 폴트라도 하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눈앞으로 분명히 보이는 차이가 있는데도, 부모의 마음은 끝까지 혹시 모를 ‘기적 같은 역전’을 기대한다. 이기고 지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내 아이가 이기는 쪽에 서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문득, 그런 나를 보며 내 엄마가 떠올랐다. 아마 엄마도 나를 바라보며 비슷한 마음을 품었을 것이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게이’가 된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였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 적어도 어머니는 그것을 알고도 외면했을 것이다. 테니스 경기에서 실력 차이가 분명한 아이에게 부모가 ‘그래도 오늘은 이길 수 있을 거야’라고 희망을 거는 것처럼, 어머니도 나에게 그런 ‘바람’을 걸었을 것이다.
아무리 객관적인 현실이 눈앞에 있어도, ‘혹시 아닐지도 몰라’라고 기대하는 마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테니스 실력은 연습과 시간으로 바뀔 수 있지만, 사람의 정체성은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가 노력 없이 1등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일반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게이들이 이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게이로 태어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는 결국 자식을 위하려고 한다. 때로는 잘못된 방식으로 기대하고, 때로는 현실을 부정하려 들지만, 그 마음속 바탕에는 사랑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억지로 바뀌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
받아들여진 채로 살아가는 일 그리고 나도 언젠가 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그것만이 모두에게 가장 좋은 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