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정말 열정적으로 살았다. 지금도 여전히 열정적이지만, 이제는 아무 때나 나서지 않는다. 에너지를 쏟을 곳과 지켜볼 곳을 구분하게 된 것이다. 오늘 행복이가 테니스 학원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했다. 코트 주변에는 각자의 꿈을 자식에게 걸고 뜨겁게 응원하는 부모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눈빛은 마치 아이가 공을 치는 매 순간, 자신의 인생을 다시 살아내는 듯했다. 나도 그들과 한때는 같았다. 행복이는 세 경기 중 두 경기를 치렀다. 좋은 경기를 했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의 생일 파티가 있어서 마지막 경기를 포기해야 했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코트를 떠났다. 이제 이런 선택도, 이런 순간의 ‘놓침’도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만큼 나는 호주에서 게이 아빠로 산다는 것이 너무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두려움이나 위축이 아니라, 그냥 나의 평범한 하루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문득, 한국에 사는 게이들의 삶이 떠올랐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한다. 게이는 병이 아니고, 죄도 아닌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받아들이기 힘들까.
나는 한국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건 공기처럼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권리다. 게이라는 이유로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 차별은 인간의 존엄을 갉아먹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움에 떨던 한국의 게이가 아니다.
나는 이제 두려움에 떨던 한국의 게이가 아니다. 나는 당당한 게이 아빠로, 내가 선택한 이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행복이를 통해 나는 진짜 자유가 무엇인지 배웠다. 자유란, 누군가의 인정 속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자유가 나를 아버지로 만들었고, 또 한 인간으로 단단하게 세워 주었다. 행복이를 키우면서 나는 배운다. 사랑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자라는 것임을.
그 아이가 웃을 때, 나는 내 안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대신 확신이 자란다. 이제 나는 안다.
진짜 용기는 세상과 싸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용기를 배워가며, 한 아이의 아빠로, 한 사람의 게이로, 이 평범한 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한국의 게이들도 나의 같은 경험을 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