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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레트 Oct 08. 2022

엄마를 잃은 딸의 일기 Ⅱ

그리움으로 쓰는


22년 3월 26일     


지인들은 걱정하는 마음으로 위로와 조언을 건넨다. “괜찮아?”, “힘내.”,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지.”, “빨리 털어내자.”, “잘 이겨냈으면 좋겠어.”,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야.”, “엄마가 이렇게 사는 거 원치 않을 거야.”, “잘 살아야지 엄마도 좋아하시지.”, “바쁘게 살아야 잊어버리지.” 그런 말들은 가끔 분노로 이어지고, 차라리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어. 미안해.”라는 말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분노가 시작되면서, 온 가족이 분노를 느낀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족 대부분이 위험하게 운전하는 차를 마주할 때는 분노가 극대화되어 온갖 욕을 퍼붓는다. 출퇴근길에 다양한 운전자를 마주한다. 어느 날, 한 차가 뒤에 따라붙다가 위험하게 앞을 가로질러 빠르게 달린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터질 듯 뛴다. 저 멀리 가버린 차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분노와 억울함에 눈물이 터진다. “왜! 왜 하필 우리 가족이냐고! 저렇게 나쁜 사람도 많은데! 착하게 살아온 우리 가족한테 왜 그러냐고! 도대체 왜!”     

시간이 지나면서 분노가 심해진다. 분노가 어디로 향해 일어나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렵다. 꽤 잘하는 상담가를 소개받아,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다.

“많이 힘드시겠어요. 그런 감정 충분히 느낄 수 있어요. 당연한 거예요.”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다. 또 상담받으러 가야 하는데 너무 가기 싫다.

‘저 사람은 겪어보지도 않았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

‘어떤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고, 어떤 조언도 듣고 싶지 않아.’     


지인 중에, 얼마 전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엄마를 잃은 언니에게 연락했다. “뭐해요? 보고 싶어요.” 언니는 고민도 없이 “보자. 갈게.”라고 답하며,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언니와 함께 각자 엄마의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웃고, 운다. 다른 과정으로 엄마를 떠나보냈지만, 엄마에 대한 마음과 애도의 감정이 맞닿는다. 서로 위로의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엄마 이야기만 했는데 위로가 된다. 내 마음이 온전히 공감받는 순간이다. “어떤 상담보다 언니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좋아요.”         

 


22년 4월 15일     


임용 시험에 최종 합격한 날, 결과를 들은 온 가족이 울었다. 일말의 안도감, 나를 향한 기특함, 이 소식을 전할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섞인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고맙다.”

임용 최종 합격이란 결과가 그다지 기쁘지 않다. 마치 이런 결과를 위해 더 소중한 것을 잃은 기분이다. 후회와 그리움이 더 짙어진다.

 상담은 너무나 많은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내담자의 말에 경청하고 공감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 머리와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감정 파도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내담자가 하는 말에 집중이 되지 않고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기 어렵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지도 못한다.



엄마 없는 생일이 두렵다. 지인들에게 많은 연락이 왔지만, 풍요  빈곤처럼 공허한 생일이다. 엄마가 살아있다면 “~ 생일 축하해. 엄마는 우리 딸이 있어서 든든하고 행복해.  먹고 싶어? 엄마가  줄게~” 했을 텐데. 아빠가   팔찌를 건네며 ‘엄마가 보관하고 있더라.’라고 했다. 나중에 아기를 낳고,  아이가 돌이 되면 주고 싶었을까? 아이를 낳을 ,  아이의 돌잔치 , 초등학교에  , 사춘기가 오면  엄마가 보고 싶을 것이다. 엄마는 이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엄마 마음이 궁금한데 물어볼 수가 없다.        



22년 6월 22일     


‘더 이상 현실을 바꿀 수 없어. 과거로 돌아갈 수도, 현실을 행복하게 만들 수도 없어. 내 능력으로 가족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도 없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서 걷고 있는 나는 날아갈 수도, 터널을 숲 속으로 바꿀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능력의 한계-어쩌면 무능력함-를 절절하게 깨달은 뒤에 우울과 무기력이 왔다.


남편이 마음에 환기를 시켜보자고 제안했다. 나무와 꽃들의 여러 가지 색깔과 아름다움으로 눈과 숨이 정화되는 곳으로 갔다. 막상 도착해서는 식물과 경치를 보지 않는다. 조금 걷다가 지쳐,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쳐다본다. 커플이 다정하게 사진 찍는 모습이 보인다. 가족들이 손을 잡고 목적지를 옮기려는 장면도 본다. 노부부가 함께 속도를 맞춰가며 천천히 걷는 걸음걸이도 본다.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해 보인다. 나 혼자 새까만, 움직이지 못하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돌덩이가 된 느낌이 든다.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나 혼자 불행하고, 불쌍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원래 다수의 사람을 만나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런데 알고 지냈던 지인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 마냥 해맑고 즐거운 모습이었던 과거의 나를 아는 지인들을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두렵다. 과거의 내가 아닌데, 예전처럼 행동해야 한다. 지금의 내 모습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만나자고 연락을 먼저 하지도, 만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렵게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방이 눈치를 보는 모습이 보인다. 엄마에 대해 언급하기도, 언급하지 않기도 애매한 분위기가 계속된다.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든다. 하지만 이제는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기도, 여러 사람에게 에너지를 쓰는 일도 힘들다.           




22년 8월 24일     


꿈을 자주 꾼다. 꿈에도 단계가 있는데, 제일 높은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꿈속에서 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촉감도 느낀다. 입관 때 본 엄마의 얼굴이 무의식에 남아 한동안 꿈속에서 엄마의 얼굴은 무표정이었고, 악몽처럼 슬프거나 놀라는 일이 많았다.


엄마 생일이 다가오니 엄마가 더 보고 싶은지 꿈에 자주 나온다. 추석 전에는 여태 꿨던 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엄마가 평소 자주 입던 흰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집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엄마 죽고 나니까, 그 사람은 본색을 드러내더라?”

“그럴 줄 알았다, 그거~”

엄마와 평소처럼 수다를 떨다가, 엄마를 꽉 껴안았다. 꿈에서 만나면 꼭 안아서 엄마의 품을 느끼고자 다짐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환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우리 지켜보고 있지? 우리 잘 살 테니까 엄마가 지켜줘야 해. 엄마가 또 이렇게 꿈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꼭 또 와서 얼굴 보여줘.”

옆을 보니 조카 S가 앉아 있다. A가 동생을 보더니 놀라서 “S야!”하고 부른다. 언니도 S를 보고 놀라 다가온다. 그러자 A는 S의 조그만 손가락을 잡아, 엄마를 가리키며 “S야. 엄마야, 엄마.”라고 말한다. 얼른 엄마한테 안기라고 가르쳐주는 듯하다.


눈을 떠보니 새벽 5시.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 눈을 계속 감는다. 다시 보고 싶다. 다시 그 꿈에서 웃는 엄마 품에 안기고 싶다. 조카의 사랑스러운 손가락을 만져보고 싶다. 눈을 계속 깜박거리지만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이 내게 다가왔다. “꿈에 엄마랑 S가 나왔어. 엄마가 환하게 웃었고 엄마 품에 안겼어. 꿈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서 한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었는데, 더 이상 보지 못했어.”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서럽게 운다.



22년 9월 28일  


꿈은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함께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반영되는 듯하다. 김장철이 다가오니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엄마 살아있을 때 김장 배울걸. 엄마 노트에 적혀 있는 김장 재료로 10포기만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 날에는 꿈에 엄마가 나온다. 엄마를 보자마자 “엄마, 나 김장하는 방법 알려줘. 빨리빨리.”라며 엄마를 재촉한다.

다른 꿈에서는 가족 여행을 가려고 캐리어에 옷을 담는다. 앞에 앉아 있는 엄마를 향해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영상을 찍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꿈에서 급하게 사진과 영상을 찍는다.      


점심 도시락을 싸서 출근한다. 다른 분들이 “맛있겠다.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만드는 거야? SNS에 사진 한번 올려 봐요.”라고 말해주셨다. 계속되는 칭찬에 6월 말부터 취미로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요리도 힘들고, 금방 지쳐서 하다가 안 하다가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좋아해 주고, 반응이 생기니까 재미가 생겼다. 일하는 중에는 잠시 잊다가도 퇴근하고 나면 많은 생각에 잠기는데, 요리하는 순간에는 생각을 멈추게 된다. 그래서 더 바쁘게 요리를 한다. 오늘은 같이 일하는 선생님이 “선생님 요즘 활기가 생긴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해주기 바빴던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 난 역시 엄마를 닮았나 봐. 여전히 아프고, 힘든 시간을 버텨내고 있지만, 요리하면서 조금은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는지도 몰라. 엄마처럼 맛있고 건강해지는 음식 만들면서, 나눠주면서 살아볼게. 엄마의 손 맛이 느껴지는 음식 먹고 싶다. 한 상 가득 차려준 엄마 밥을 먹고 싶다. 아니, 이제는 내가 맛있는 밥상 차려주고 싶다. 엄마 오늘은 뭐 먹고 싶어?라고 물어보고 싶다.  





**시누이와 인터뷰를 하고, 일기형식으로 쓴 글입니다. 2차 수정은 시누이가 직접 했고, 그 이후의 퇴고는 다시 제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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