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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복사 Jun 11. 2024

29화. 사랑이 흐르는 자리

매실청은 3년 숙성부터 맛있다. 내가 좋아하는 건 5년 숙성의 매실청. 비단, 매실뿐이 아니라 뭐든 3~5년 숙성이면 요즘 카페 음료 같은 달달한 맛이 아닌 깊은 맛이 난다. 모든 건 다 때가 있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엔 열매가 맺혀 가을엔 먹을 수 있는 것처럼. 겨울엔 빼빼 마른 나뭇가지를 보며 자연의 순리를 그리워하는 동시에 발달된 기술로 빚어진 딸기나 반건시를 먹는 것처럼.


소화 기능이 약했던 건지 주어진 위보다 과하게 먹었던 건지, 나는 자주 체하곤 했다. 너무 체해서 손톱 옆에 빨간 점이 콕콕 박혀 있었다. 체했다는 사실도 늦게 알아채서 한번씩은 꼭 이불 빨래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매실청은 단 한 사람, 나를 위해 등장했다.


나는 먹성이 좋은 아이였다. 한편으로는 좋은 척하는 아이기도 했다.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고 식구는 많아서 외식은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그는 그런 것을 초월하여 우리를 사랑했다. 문제는 언제나 그의 사랑이 더 컸다. 텃밭까지 가꿔 고추며, 토마토며, 감자, 고구마, 상추 등등 최대한 좋은 재료를 마련해 요리를 해주었지만, 대부분 그의 음식에 호응하지 않았다. 터울이 짧은 언니와 나는 감탄사를 쏟아내며 앞다퉈 먹었지만, 터울이 긴 동생은 입이 짧았고, 그의 배우자는 무반응을 표현이라 여겼다. 나는, 단지 하나의 마음뿐이었다. 그의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그렇게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만들 기운이 정말 하나도 없지만 매실을 사다가 청을 담그기 시작했다고. 공들여 만든 매실청을 내가 곧잘 먹었고, 그 뒤로 체하기를 멈췄다고. 그렇게 수년을 매해 청을 담그게 되었다고. 그러던 어느 해부터는, 기껏 해놓은 청을 먹지 않았고 그렇게 3년 숙성, 5년 숙성의 청이 탄생한 거다. 그는 어이없어했지만, 3년 숙성 매실청은 정말 기가 막힌 맛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3년 숙성된 매실청이 왜 있냐는 내 물음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에서 점차 나를 노려보던 그의 눈빛. 미움은 하나도 없던 그 눈빛. 아무쪼록 나는 제법 그런대로 살아가는 어른이 되었으므로, 매실청을 매해 담그진 않고 3년 숙성에 맞춰 담근다. 아직은 혼자 담그진 못하지만, 머지않아 매실을 고르는 것부터 담그고 적당한 때에 매실을 꺼내 저장해두는 것까지 전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형태로 있든 그의 사랑은 내게로 와 흐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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