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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복사 Jun 25. 2024

30화. 혁명의 사랑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 그걸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사지육신 멀쩡한데 일할 곳이 없고, 의식은 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고, 기계에 의지해 숨을 쉬는 가족 옆에서, 돌이킬 수 없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가족 옆에서, 반려동물이 아픈데 병원에 입원시키는 것 말고 더 할 수 있는 게 없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도 입을 닫으라 강요받을 때, 부당한 처사임을 알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는 죽는 것보다 더한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가장 괴롭고 견디기 힘든 형태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 이전에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그가 성별을 비밀에 부쳐 태어난 아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그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랑하면 혁명하지》는 결국 그에게서 흘러나온 진정한 사랑의 혁명인 것이다.


《사랑하면 혁명하지》에서 칭한 ‘그’는 내겐 엄마였으나, 누군가에게는 아빠고 할머니고 할아버지고 이모고 삼촌이고 형제이고 또는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꼭 피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넓은 의미에서의 가족 또는 보호자로, 아이였던 나를, 당신을 보살펴 준 어른이 한 명쯤은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우리는 양방향이 아닌 한 방향의 사랑으로도 성장하니까. 사랑의 부피를 재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사랑하는 만큼 사랑을 받지 못해도 잘 성장할 수 있음을, 그에게서도 나 자신에게서도 배워 알고 있으므로.


어릴 때는, 그의 모든 불행이 나로부터 시작된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했다. 나를 낳지 않았다면, 그의 얼굴에 마비 올 일이 없지 않았을까. 셋보단 둘이 키우기 낫지 않았을까. 키우기 쉬운 아이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나와 똑 닮은 아이를 키운다고 가정하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마는데. 죄책감과 원망과 분노와 슬픔과 이름 붙이기 어려운 그 모든 감정을 넘어서,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가정법에 종결을 맺으며 나는 남은 시간에 후회 없도록 혁명의 사랑을 계속 전할 생각이다. (by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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