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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조각
1.
비둘기 한 마리가
가게 처마 밑으로 날더니
결국엔 크게 부딪치고 나서야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둘기는 가끔 엉뚱하게 날고,
인간인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2.
겨울 신발을 하나 더
장만하러 가서 신어 보는 동안,
직원이 내 신발을 DP 상품으로 오인해
전시하려는 것을 겨우 막았다.
왼쪽은 진짜 DP 상품,
오른쪽은 내 신발을 신은 채로
제 신발이에요~ 외치며 달려갔다.
최근에 나온 운동화를 구매했더니 생긴
웃기고 살벌한 일화다.
3.
환풍기가 고장 나서 새로 달았는데,
온풍 기능이 있어 참으로 따습다.
솔직히 전기세 걱정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
민영화를 목표로 계속 오르는 공과금에
허리띠를 졸라맸더니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4.
따뜻한 유자차가 너무 마시고 싶었는데,
늦잠을 자서 집에 있는 유자청을 못 챙겼다.
무엇보다 조금도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에
머리만 미치도록 시린 출근을 경험했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설움이었다.
5.
의심이 든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나를 믿고 당차게 나아가고 싶은데,
현실은 자꾸 소화가 안 되어
손가락마다 붉은 점이 별처럼 박혀 있다.
물론, 약도 먹었다.
경증이어서 병원에 가지는 않았지만.
삶을 놓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어지간히 잘 살고 싶은가 보다.
6.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오랜만인데,
나는 주변에 흡수가 잘 된다.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있으면 말씨를 닮고,
소설책을 읽으면 말이 장황해지며,
시집을 읽으면 지나치게 함축하고,
인문학을 읽으면 근거를 찾게 된다.
병렬 독서의 습관 덕에
나름의 중심을 유지하는 중이다.
7.
프라이팬이 닳아서 새로 샀다.
코팅이 금방 벗겨지는 것 같아
새로운 브랜드에서 샀는데, 실패다.
항상 28cm 지름으로 썼던 터라
똑같이 28cm 지름으로 구매했는데,
줄자를 가지고 확인해 보니
기존 제품은 28cm보다 크고
새로 산 건 28cm보다 작은 아이러니.
끓어오르는 속상함과 귀찮음을 억누르며,
속히 교환 신청을 했다.
새 프라이팬에 먹을 삼겹살을 기대했는데.
결국은 헌 팬에 구웠다.
8.
육류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덜 해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지구도 지키고 싶다.
소비를 줄이고 전시 또한 줄이려고 하지만,
참 쉽지 않다.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어찌 첫술에 배부르랴.
한 단계씩 차례차례.
서두르지 않으면서 완전하게 나아가야지.
익숙하고 편한 일상을 뒤집는 일은,
결심부터 쉽지 않고.
실천을 넘어
다시 일상으로 만드는 일은 더 어렵다.
그래도, 그렇게 조금씩
되고 싶은 인간상에 가까워지고 싶다.
by 개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