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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조각. 초당 우수수

by 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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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조각



4월 말에 감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유는 조금 거창했다.

살아보고 싶어서.

‘잘’이라는 부사 없이

담백하게 그냥, 살고 싶어서.

그렇지 않나.

다들 죽겠다고, 죽고 싶다고 하지만

살아내고 싶은 마음이란,

꼭 무대 위 단독 조명을 받는 주인공처럼

어딘가에 움터서는 존재감을 드러내니까.

이번 4월은 이르게 더울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너무도 봄 같은 날씨였다.

봄. 새싹이 돋는 그 희망찬 계절이

내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계절이었다.

지성인이고 어른이고

사회생활이고 나발이고

죽겠는 것이었다.

억울해도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조차

받기 어려운 게 현실.

있지, 지금 이런 상황은

따지자면 너의 잘못도

없다고 볼 수는 없는데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게

낫지 않겠어?

이정도 해주는 것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입장을 좀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너는 정말 유난이고 유별나고

사람을 괴롭게 하고

답이 없다는, 말 그대로

적반하장의 사람들.

철면피의 사람들.

답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상황들.

이어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난데없이 우수수 떨어지는 생필품처럼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에너지가 사라진 게 4월 말쯤.

뭘 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다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감사일기라도 써보자고.

아침은 출근으로도 바쁘니까

출근길 대중교통에서

감사한 일 3개 적기로 다짐했다.

종이 공책 있어 봤자 손이 안 갈게 훤해서

이전에 사둔 메모 앱 중에 하나 골라

세팅도 해놨는데.

결말은 4일 성공.

그것도 연속 아니고 징검다리로.

일기를 매일 쓰니까

당연히 감사 일기도

성공할 줄 알았다.

그래서 감사 일기가 효능이 있다는 걸까.

쉽지 않아서.

하루에 욕을 백만 개를 해도 부족한데,

감사한 일을 3개씩이나 생각하고

그것을 마음을 가다듬고

공책이든 어플이든

시간을 내서 꼬박꼬박 쓰다보면

초당 우수수 떨어지던 마음들이

조각이라도 좀 모아지고

이렇게 저렇게 엉켜붙어서

다시 하나의 온전한 형태가 되는 것일까.

새까맣게 잊고 살던 감사 일기를

다시 좀 써봐야겠다.

살고 싶은 마음도

죽고 싶은 마음도 여전하니까.


<오늘의 감사 일기>

하나. KFC에서 치킨 세 조각과

에그타르트를 먹어 감사하다.

둘. 금요일에 야근을 하지 않아 감사하다.

셋. 먹고 싶은 걸 먹어도

알러지가 나지 않아 감사하다.


by 개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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