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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복사 Mar 12. 2024

16화. 권한 밖의 시간 속에서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살아남고 난 뒤에 오히려 살아남지 못하는 때를 생각한다. 나는 끝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다음을 생각했지. 뭐 하고 놀까, 저녁은 무슨 반찬이 나올까, 지금 하는 게 끝나면 뭘 해야 할까. 그런 면은 그와 닮았다. 그는 가정법이 없는 사람이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에게는 지금과 다음뿐이다. 어릴 때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후회를 안 할 수가 있지? 제각각으로 아프고 사고를 치고 멋대로 나아가는데, 분명 힘이 들 텐데 그런데 후회를 안 할 수 있다고? 어떤 상황에서 물어도 그의 대답은 같았다. 후회한 적 없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살지 않았어. 지금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후회를 해본 적 없다는 그를. 내가 아는 그라면, 충분히 후회와 연관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있었으니, 나 역시 그 존재 여부를 의심해 본 적 없다. 앞도 못 보고 똥만 싸던 때에도, 온갖 데 열심히 기어다니던 때에도, 드디어 걸음을 배워 뛰다니던 때에도, 학교를 가고 거듭 진급을 하고, 어른이 되고, 청춘에서 거리가 생겨가는 지금까지도. 누구라도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끝을, 끔찍하게 싫은 어떤 끝을 생각하게 된 건, 오로지 글을 통해서다. 먼저 겪은 어른들의 이야기. 자꾸 산으로 내달리던 어머니를 결국 산에서 잃었다는 사람, 하루아침에 사고로 부모를 잃었다는 사람, 긴 투병 끝에 아버지를 떠나보냈다는 사람,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을 겪은 사람⋯⋯. 그런 현실의 이야기가 가득 담긴 소설도 많이 읽었다. 희한하게, 이전에는 뭘 읽어도 그런 주제가 없었는데, 지금은 찾아 읽지 않아도 한번씩 마주하곤 하는 것이다. 알고 싶지 않고 겪고 싶지 않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데, 그런데 그와 나 사이에는 이제 얼마큼의 시간이 남아있지. 그걸 알 수 있다면 좋을까. 내 젊음과 시간을 떼어다가 그에게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치곤 등짝 스매싱과 친한 게 현실이다. 확실히 머리가 커지고 나서는 쉬이 수긍하는 법이 없다. 그의 방식은 영 이상하고 모르겠고 고쳐줬으면 싶은 게 자식의 고집. 하지만 그의 방식은 정확하고 신통한 구석이 있어 정신 차리고 보면, 망언을 한 내 입을 때리며 그의 방식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 결국은 생각할 것 없는 이야기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닿기 마련이다. 그것이 불시라는 불공평으로 오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저녁을 먹고 왔더라도 그가 차려준 밥을 맛있게 먹고, 괴로운 하루더라도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흘리듯이 말한 물건을 사다 선물하고, 시장에 갈 때는 쫓아가 도깨비 같은 짐꾼이 되고, 해이해진 형제자매의 기강을 잡고, 같이 할 수 있는 그의 취미에 동행하고, 철마다 손 편지를 쓰고, 먹고 싶다는 음식을 같이 먹고 또는 만들어주고, 부드러운 단호박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말에 전국 단호박 케이크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대들고, 싸우고, 서운해 눈물이 쏟아지더라도 그런 내가 미워 펑펑 울다가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언제나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바람을 안고, 오늘은 소 선지를 넣고 만든다는 곳에 찾아가 순대를 포장해 가고 있다. 그의 입맛에 꼭 맞았으면 좋겠다. 그가 내내 먹고 싶어하던 맛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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