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른바 샌드위치다. 위로 하나 밑으로 하나 형제가 있다. 어떤 때는 첫째같이, 어떤 때는 막내같이, 어떤 때는 진짜 단단히 낑겨 있는 삶은 생각보다 더 고단하다. 사람들은 나를 첫째로 알기도 하고 둘째로 알기도 하고 막내로 알기도 하는 걸 보면, 그 세 위치의 장단점이 은근히 묻어있는 듯하다. 그러나 사이에 끼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배려와 협동심이 생기는 건 아니다. 특히 나누는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오늘날의 내가 지니고 있는 배려와 협동심은 아찔한 외줄타기처럼 위태롭게 잃을 뻔하였으나 끈기있게 키워진 교육의 결과다.
나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으나, 그는 태초에 나를 알아보았다. 이 녀석은 욕심쟁이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교육 키워드는 ‘함께’였다. 다른 형제들은 뭐였는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그는 내게 ’함께’를 강조했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나눌 줄 알아야 한단다. 나는 네가 가지려고만 하고 나누지도 베풀지도 않는 삶을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자, 너에게 콩 한 쪽이 있어. 그러면 어떻게 할래? 내가 먹어! 아니지, 콩 한 쪽을 똑같이 나눠서 같이 있는 사람들과 나눠야지. 콩 한 쪽을 어떻게 나눠! 나 먹을 것도 없겠는데, 그냥 내가 먹으면 안 돼?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걸 알아서 이렇게 알려주는 거야. 나누는 것엔 크고 작은 게 중요하지 않아. 얼마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누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거야. 콩 한 쪽을 보고 나누려고 하는 마음에서부터. 누가 과자를 주면 어때? 좋아! 내가 네 몫으로 탕수육을 하나 더 주면? 너무 좋아! 그래, 누가 무언갈 주면 너무 좋지? 다른 사람들도 같아. 그리고 그렇게 나누다 보면, 그 마음이 다시 네게로 돌아오게 돼 있어. 그래도 나누는 게 싫고 혼자 다 가지고 싶으면, 기억해. 결국, 나누는 것도 다 자신을 위한 거라는 걸.
내가 그 대화를 여적 외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또한 그 가르침을 내가 어떻게 배우고 실천해 나갔는지 설명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는 내게 꼭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먹는 것에 있어서는 특히나. 갖고 있고 싶고 쥐고 있고 싶을수록 베풀라던 가르침. 미운 사람일수록 더 나누고, 나눌 때는 되도록 차등을 주지 말라던 맞춤형 교육.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무수한 것 중 하나지만, 대들보와같이 없으면 안 되는 나눔과 배려와 베풂. 이제 와 돌이켜보면, 한 명의 사람을 어떻게 키워내는 건지 참 알 수가 없다. 말한다고 다 듣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기억하는 가르침이 있지만 반면에 새까맣게 잊은 가르침도 많다. 한 번씩 그에게서 통탄스러운 숨을 뱉게 하는 나의 맑은 무지도 나름대로 노력의 결과니, 미운 만큼 더 먹이는 수밖에. 아기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청소년도 아니고 어른이라고 하기에도 뭐가 아주 부족한 것 같지만, 하루하루 이렇게 한 사람의 몫으로 먹고 자고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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