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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복사 Apr 02. 2024

19화. 나, 참! 왜!


엄밀히 말하면, 참외는 밭에서 나는 열매채소다. 하지만 편의상 과일이라고 칭하겠다. 신호등 초록불을 파란불로 칭하듯 통상 그렇게 쓰일 만큼 익숙하므로. 며칠 전, 엄청 맛있게 다디단 참외를 먹었다. 그가 운동하러 오가는 길에 비교적 합당하게 팔리고 있던 참외를 놓치지 않고 사 온 덕분이었다. 과일 없이 못 사는 우리에게는 참혹한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한 입이란, 한 개도 한 봉지도 아닌 한 박스다. 물론 물가를 떠나 당이 많은 과일을 이제는 그렇게 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조절해서 먹는다. 그래도 자의로 안 먹는 것과 강제로 못 먹는 것은 다르지.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맛있고 다디단 과일이 우리 일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과일이 풍족하던 어느 시절엔 귤을 하도 먹어서 노란 인간이었던 적이 있다. 나는 기억 안 나지만, 노란 인간이 노란 귤을 박스채 털어먹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깊었다고 그가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때는 참외를 그렇게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한창 성장기였던 걸 생각하면 더 어마어마하다. 그가 거의 격일 간격으로 참외를 박스채 사다 날아야 했으니, 과도 첫 사용이 참외였다는 것도 자연스러운 전개. 그날, 하교 후 평소처럼 참외가 먹고 싶었고 과도를 사용할 줄 몰라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가 아마 5학년, 열두 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불과 칼 사용에 있어서는 확고한 교육관으로 특히, 우리가 혼자 있을 때의 사용을 금했고, 때문에 나는 금기와 욕망 사이를 오가며 어서 퇴근 시간이 되어 그가 오기를 바라며 하염없이 시계만 바라보았다.


1분이 1년 같았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참외를 꺼내 씻어두고 옆에 과도도 가져다 두었는데, 그게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참외가 어찌나 단 녀석이었는지 그 단내가 코를 간질거리니 배도 점점 고파오고 죽겠는 것이다. 초침 소리가 슬로 모션처럼 지나가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는 끝내 기다리기에 실패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과도를 집었다.


그가 참외를 깎던 모습을 열심히 떠올렸다. 뭐부터 해야 하더라. 제일 먼저, 참외의 양 끝 꼭지를 자르기. 그리고.. 참외는 세로로 깎지! 그런데 사과보다는 두꺼웠던 것 같아. 두껍게는 좀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살까지 깎아낸 참외를 맛있게 먹고, 이번에는 빨리 칭찬받고 싶은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던 것이다. 신나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들썩이면서. 그의 반응이 어땠을 것 같은가. 그날도 양손 무겁게 참외를 나눠 들고 귀가한 한여름의 직장인, 가계 살림을 도맡아 10원 단위까지 알뜰살뜰 관리하는 가장인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뿌듯해서 들뜬 나보다는 먹은 건지 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참외의 흔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내 ‘업적’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멍하니 그 흔적을 바라보았으리라. 그는 내게 물었다. 이게.. 참외를 먹은 거야? 대체 똥만 싸는 참외가 뭐가 좋다고..!


그전까지는 살면서 그것도 먹는 것으로 그에게 혼나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더 먹으라고 했고 잘 먹는다고 칭찬만 받던 삶이었다. 참외를 두껍게 깎았다고 해서 그렇게 화낼 줄도 몰랐고, 혼날 줄도 몰랐고, 칭찬을 못 받을 줄도 몰랐다. 하지만, 화내고 혼내며 자책하는 엄마와 달리, 죄송하게도 나는 화내는 그보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참외 봉지에 더 정신이 쏠렸다. 저기 있는 참외는 몇 개인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달 것인지. 그다음 장면은 이렇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뒤, 나는 그의 품에 안겨서 그가 깎아주는 참외를 먹으며 그가 왜 화를 냈는지에 대해, 혼자 있을 때 과도 사용의 위험성과 과일마다 깎아 먹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내가 갑자기 몸에 열이 차던 시절이라 땀처럼 계속 배출시키는 수박보다도 몸을 차갑게 해주는 참외가 그렇게 당겼던 것 같다. 그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배앓이도 많이 하고 몸도 찬 애가 왜 몸을 차갑게 하는 참외를 먹는지 알 수 없어 힘들었다고. 애가 먹고 싶다는 걸 안 먹일 수도 없으니 아주 죽겠는데, 물리지도 않고 박스채로 먹으니 곤란했다고. 그 참외 사건은 이후에 우리 사이에서 서로를 놀리는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특히, 참외 먹는 날에는 꼭 외쳐주어야 한다. “이 똥만 싸는 참외를..!” 참외를 이 사건에 대한 언급 없이 그냥 먹는다는 건, 한여름 햇빛에 5시간 노출된 뜨거운 참외를 먹는 것과 같달까. 그러나 그런 박스 채의 과일은 내리사랑의 흔적. 그의 어린 시절엔, 귀한 늦둥이를 위해 할아버지가 과일을 박스 채로 냅다 사 오셨단다. 이제는 내 차례가 되어 더 폭넓고 다양해진 과일을 놓치지 않고 먹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딸기, 토마토, 복숭아, 포도 같은 것만 봐도 별별 품종이 다 있어 죽겠지만, 더 새롭고 더 맛있는 과일 모두 놓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과일 사랑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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