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책과 힘과 벽

by 자정의 크리스마스

이 글은 잔나비의 '꿈과 책과 힘과 벽'의 가사를 인용하여 썼습니다.


때늦은 가을날씨가 계속 되어 겨울이라는 걸 모두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수현만은 이미 겨울이 왔다는 걸 누구보다 무섭도록 실감했다. 수현은 6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30살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함. 한 해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겨울이 되면 수현은 자신이 가진 평범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평범한 것은 중간값일까 평균값일까. 수현은 평균에는 미치지 못하되 중간값쯤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기로 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아주 소수이고 그 격차가 너무 커서 평균이 너무 높아진 것이라고, 사실 대다수의 청춘은 이 바닥에서 같이 허우적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올해도 시험에서 떨어졌다. 이것은 도돌이표를 의미한다. 다시 처음으로.



시험에 미끄러지고 난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리고 오늘도 수현은 언제나 똑같이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조용히 집안에서 아침을 준비했다. 약간의 시리얼을 말아 먹고 가방에 문제집과 수첩따위를 잔뜩 욱여넣는다. 조금 추운 날씨이지만 그가 있는 실내는 언제나 사람이 밀집되어 있어 덥고, 더우면 졸리기 때문에 외투를 제외한 옷은 얇게 입는다. 그러고는 구겨진 신발을 고쳐 신을 생각조차 없이 집을 떠난다. 이른 새벽에 집을 나와 저녁에 돌아오는 그는 해를 마주하지 못한 지 꽤 오래 되었다. 학원으로 가는 길에 그는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는다. 머리를 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잔뜩 들어있는 가방에 머리마저 넣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죽어있고 싶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보면 노량진으로 향해가는 지하철은 시간이 갈수록 비슷한 행색의 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날개가 돋기 위해 유충으로서 매미는 땅속에서 7년을 버텨내야하는 것 처럼 이 지하철에도 미처 날개가 돋지 못한 학생들이 저마다의 무거운 어깨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를 달린다. 닭장같은 학원의 좁은 책상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오늘도 수현은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처음은 단순히 부모님의 권유였다. 머리가 썩 나쁘지 않았던 그는 취직의 길에서 고민할 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보는게 어떻겠냐는 부모님의 말을 그냥 순종적으로 따랐을 뿐이다. 첫 해에 떨어진 건 첫 해라, 두번째 해는 진짜 아깝게 떨어져서, 다음 해에는 꼭, 그 이듬해에는 반드시. 그렇게 다섯번째 해가 되었을 때부터 그는 침묵을 택했다. 계속되는 불합격 소식에 집안 분위기가 얼어붙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금이라도 그가 쉬는 것 같을 때, 거실에서 티비를 볼 때, 핸드폰을 들여다 볼 때 아버지는 흘끔 보다가 쯧하고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가버리셨다. 수현은 결국 좁은 책상을 벗어나 집에 돌아와서도 또 다시 작은 방 밖으로 한 발자국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수현의 아버지는 귀도 어찌나 밝은 지 한 숨이라도 푹 쉴 때면 뭐가 잘나서 한 숨을 쉬냐며, 들으라고 하는 한숨이냐며 핀잔만 듣게 되었다. 결국 수현은 좁은 방 안의 그림자가 되기를 택한다. 조용하고 까만 아주 어두운 그림자. 어둠 속에서 꺼지지 않는 스탠드가 그를 더 짙고 까맣게 타버리게 만들었다. 오늘은 묵묵히 응원해주시던 어머니마저 잘 깎여진 과일을 들고 들어오셔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안 되는 것도 이유가 있지 않겠니. 물기어린 목소리가 따뜻하고 뭉툭했지만 마음을 파고들어 그를 상처 내기엔 충분했다. 찔린 마음에서는 차가운 미움이나 원망따위가 아닌 뜨겁고 화끈거리는 울음만이 새어나왔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수현은 울고 또 울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꿈 꿨던건 이런 서른이 아닌데 하고 그는 어머니가 떠난 방안에서 울음을 멈추고 지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유치원때 숙제로 그려 냈던 30살의 어른 수현의 모습을 떠올린다. 어떤 직업의 어떤 모습이었는지 뚜렷이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이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꿈은 크게 꾸라면서, 야망을 가지라면서, 목표를 향해 달리라면서 아무도 그만두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답습하는 그 오래된 낡은 말들에는 누구의 책임도 없었다. 달리는 법은 배웠어도 아프지 않게 넘어지는 법, 멈추는 법, 쉬어가는 법 같은 건 도무지 몰라 그는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깊은 어둠 속을 속수무책으로 울며 달릴 수 밖에 없었다. 하루하루가 흘러가는게 견딜 수 없이 참 무서운 날들이었다. 그는 어느새 서른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서른 하나가 될 것이다. 눈을 꼭 감고 수현은 자는 것을 택한다. 도망 갈 곳 없는 어른의 밤을 지나 그는 하루 더 어른이 되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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