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 TG
토요일 오후. 어제 방학식을 끝낸 아이들 중 시간이 되는 친구들이 버스정류장 앞 패스트푸드에 모여 있었다. 가은과 태호, 문교와 효민. 표건은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짧은 여행길에 올랐다. 아이들이 잠시 기다리자 곧 이모가 도착했다. 태호는 빨리 말하고 싶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다들 먼저 왔네. 너희들 뭐 먹을래?”
이모가 앉아있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대충 사서 올라갈 테니까 너희들 2층으로 가 있을래? 여기에서 말하긴 좀 그렇잖아?”
이모는 어깨를 으쓱이며 패스트푸드 출입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이들은 모두 2층으로 올라갔다. 이모가 햄버거 세트를 트레이에 담아 2층으로 올라가자 아이들은 눈치 빠르게 2층의 구석진 자리를 맡아 놨다. 이것들. 다 컸네.
대충 허기를 면하자 태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꿈에서 차를 타고 사라지는 재혁. 열리지 않는 유리 출입문 너머로 재혁이를 부르며 문이 부서져라 흔들었던 태호.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Q와 2가 붙은 검은색 승용차. 태호는 휴대폰으로 차종을 검색해서 이모에게 보여줬다.
“이 차가 확실해?”
“네. 그런 것 같아요.”
“검색해 보니까 그랜져 TG는 Q240이랑 270이 있네?”
이모의 말을 들은 태호가 눈을 껌벅였다.
“……그래요?”
“둘 중에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 차종은 확실하다는 거잖아?”
“네.”
“검정색?”
“네.”
이모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틈에 문교가 태호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너는 그 사이에 그걸 어떻게 봤어? 글자가 번호판보다 작은데?”
“사실 번호판은 전혀 기억이 안나. 그나마 Q가 가장 정확히 보였어. 혹시 재혁이도 그렇지 않았을까?”
태호는 미심쩍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데 거기가 어디야?”
효민의 질문에 태호는 눈을 내렸다. 대단한 곳은 아니지만 나와 재혁이만이 알고 있는 장소.
“내가 예전에 살던 마을에 있던 편의점.”
“전학 오기 전에?”
가은이 물었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우리 얼마 전에 누나를 따라서 재혁이네 갔었잖아. 그 동네에서 살다가 4학년 2학기 때 전학 왔어.”
“그런데 재혁이가 그 곳을 어떻게 알아?”
이번에는 이모가 물었다.
“어렸을 때…… 전학 오기 전에…… 재혁이가 우리 학교로 축구하러 왔었어요.”
“아! 축구! 그러고 보니까 재혁이가 한 때 축구에 빠졌었지!”
문교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그때 우리가 같이 갔던 편의점이야. 초등학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데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럼 재혁이가 정말 버스를 타고 거기까지 갔단 말이야?”
“실제로 갔다면…… 그랬을 거야.”
“그럼…… 미리 만나기로 했다는 거네?”
가은이 말했다. 태호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너희도 봤잖아. 꿈에서 재혁이는 망설이지 않았어. 그 차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런 태호를 물끄러미 보던 이모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걸…… 경찰에 뭐라고 전하지? 실제로 목격한 것도 아닌데.”
“저도 그래서…… 이모한테…….”
“확실한 것도 아니라서……. 기억이라는 건 오염될 수도 있거든.”
이모의 부정적인 말에 태호는 마음이 상했다. 열심히 기억하고 생각해낸 거라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때 효민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보도 있잖아요. 익명으로.”
아이들은 일제히 효민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그러네. 그때 방송에도 나왔으니까 제보전화도 받았겠다.”
이모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이건…… 내가 한 번 해볼게.”
당직 중인 한창수 경장은 희한한 제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온 여자 목소리. 그녀는 일어난 지 1년도 지난 유괴살해사건에 대한 제보를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여자가 불러주는 대로 메모를 하다가 머릿속에 사건이 떠올랐다. 인구대비 조용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이 도시에서 근래 일어난 일 중 가장 큰 사건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표재혁. 근처 홍화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아이가 실종됐다.
그리고 한 달 뒤. 아이는 이 마을이 아니라 차로 1시간도 더 걸리는 다른 도시에서 발견됐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한창수 경장은 순경이었다. 물론 지금 하는 업무도 순경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때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경장은 요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선을 내려 노란색 메모지를 바라보았다.
그랜저TG Q240 270
이 오래된 차를 아이가 타고 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도 아이가 살던 마을이 아니라 버스로 두 정거장이나 가야하는 곳에서. 왜? 아이는 대체 왜 그곳으로 갔을까? 아이를 태우고 간 사람이 범인일까? 익명으로 제보한 이 여자는 누구일까?
-표재혁이라고…… 작년에 살해당한 아이에 관한 제보를 하려고 해요. 그 아이가 XX 삼거리에 있는 편의점 앞에서 검정색 그랜저TG를 타고 가는 걸 목격한 사람이 있어요.
-혹시 번호판은 보셨나요?
-아니요. 차종만 알아요. TG Q240 이나 270.
전화는 이렇게 끊겼다. 한경장은 끙차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캐비닛을 뒤져봐야 할 것 같다.
방학을 앞두고 효민과 태호가 재혁의 꿈을 꾸었다. 하지만 방학이 시작되자 2주가 넘도록 아이들은 다음 꿈을 꾸지 못했다. 처음에는 안달이 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름의 방학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8월 14일.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날은 연일 최고 기온을 기록 중이고 에어컨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 차라리 밖이 낫겠네. 오늘 밤에도 열대야로 잠을 이루지 못 할 것 같다. 문교의 배게 옆에는 야구공이 놓여있다. 너무 오래도록 꿈을 꾸지 않아서 방치되어 있었지만…….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날이 너무 더워 거실에서 에어컨을 켜고 가족들이 함께 잠든다. 야구공을 챙겨간들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빠의 코골이와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며 잠이 드는 여동생 때문에 자면서도 몇 번이나 깨버렸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어쩐지 예감이 왔다. 꿈에서 재혁이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거실에서 함께 자자고 엄마가 말씀하셨지만 오늘은 괜찮다고 말한다.
“방 문 열어놓고 잘게.”
선풍기를 챙기고 침대에 누워 야구공을 손으로 돌려본다. 함께 야구 했을 때가 재미있었는데. 우린 고작 다섯 명이라 외야도 없고, 유격수도 없었지만 한 팀이 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는데. 재혁이가 없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사무친다. 그렇게 스르르 잠이 든다. 툭하고 손에 들고 있던 야구공을 떨어뜨린다. 야구공이 떼구르르 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