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
“그랬는데 우리 반에서…….”
문교와 재혁이 이야기를 하며 걸어오고 있다. 행사가 많은 5월. 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초등학교와는 달랐다. 이제 1학년이고, 작년까지는 초등학생이었지만 뭔가 한층 성장한 느낌이랄까? 하굣길 곁을 지나쳐가는 초등학생들이 한없이 어리게 느껴졌다.
“아, 우리 내일 몇 시지?”
“어?”
“내일 야구.”
“아!”
재혁은 잊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맞다. 야구!”
문교는 웃으며 재혁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잊고 있었단 말이야?
지난번 근소한 차로 이긴 홍화초 6학년 아이들이 다시 한 번 경기를 하자고 문교를 졸라댔다. 형들은 중학생이라서 바쁘다고 했는데도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며 주말에라도 경기를 하자고 졸라댄 끝에 내일 2차전을 갖기로 했다. 이번에야 말로 큰 점수 차로 이겨줘야지. 다짐하고 있었는데.
“야. 나 글러브 학교에 있어.”
“뭐? 그걸 학교에 왜 갖고 가?”
“오늘 공부 안하니까 길들인다고.”
재혁은 안절부절 못하더니 문교에게 먼저 집으로 가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나 잠깐 학교에 들렀다가 집에 갈게.”
“뭐? 집에 다른 거 없어?”
“집에 있는 거는 찐뽕이라 싫어.”
“아. 새끼야. 그냥 아무거나 써.”
“아냐. 나 학교에 다시 가야겠어. 먼저 가.”
사실 아이들 대부분은 찐뽕 글러브라고 불리는 마트 글러브를 사용했다. 재혁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얼마 전 사촌 형이 글러브를 하나 물려준 것이다. 헤지고 닳았지만 오히려 부들부들하다며 재혁이는 그 오래된 글러브를 소중히 했다. 문교가 보기에는 고물처럼 보였지만.
재혁은 뒤돌아 학교를 향해 뛰어갔다. 멀어지는 재혁을 보며 문교는 곧 돌아섰지만 의식은 재혁을 따라갔다.
다시 학교 정문이다. 재혁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건물로 향했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이미 학교를 빠져나간 후였다. 학교는 조용했다. 1층 현관에 도착한 재혁은 실내화로 사용하는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글러브만 찾아서 바로 돌아올 거니까 운동화는 잠깐 여기에 놔두자.’
1학년 교실은 5층에 있었다. 재혁은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2층 음악실과 과학실이 보였다. 항상 학생들로 시끌벅적한 학교였는데 지금은 재혁의 발소리 외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고요함이 어쩐지 어색했다.
재혁은 3층으로 향했다. 계단 난간을 잡고 3층에서 4층으로 막 돌아서려는데 덜커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혁은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곧이어 또 덜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혁은 소리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3층에는 3학년교실과 컴퓨터실, 교무실이 있었다. 소리는 교무실이 있는 곳에서 들렸다.
‘아직 선생님이 계시나?’
재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마침내 5층에 도착해 교실 문을 열고 자리를 찾아갔다. 글러브가 글러브집에 담겨 책상 옆에 매달려 있었다. 재혁은 글러브집을 챙겨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4층 음악실을 지나 3층으로 내려가려 할 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책상이나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책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덜커덩 거리는 소리에 묻힌 작은 여자아이의 목소리. 무엇인가에 막힌 듯이 억눌린 목소리로 불분명한 발음이지만 저항의 뜻이 담겨 있다.
“싫어요.”
재혁은 걸음을 멈추고 다시 소리 나는 방향을 돌아봤다. 교무실. 학교는 여전히 조용했다. 평소라면 들리지도 않았을 작은 목소리. 재혁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째야 하지?
재혁은 글러브집을 계단 난간 옆에 내려놓았다. 교무실이 있는 곳으로 발소리를 죽여 걸음을 옮기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지금 내가 잘하는 짓인가? 교무실 문은 완전히 닫혀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간 선생님이 절반쯤 열어놓고 간 모양이다. 아니면 들어간 사람이 열어놓았을지도.
재혁은 문틈으로 교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잘 못 들었나? 학교와 마찬가지로 교무실도 조용했다. 3학년 1반에서 5반까지 담임선생님과 일부 예체능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작은 교무실. 책상도 몇 개 없다. 대체 어디서 소리가 난 거지? 재혁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맞은 편 벽에는 캐비닛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고 가장 안쪽 끝, 재혁이 서 있는 출입문과 일직선상의 벽에 작은 문이 살짝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재혁은 교무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알고 있다. 저 문을 열면 비품 따위를 넣어두는 작은 창고가 있다는 것을. 평소에는 열려있지 않다. 그런데 오늘은 왜 열려있는 거지? 확인만 하자. 아무도 없을 거야. 제발 그랬으면…….
발소리를 내지 않고도 단 몇 걸음이면 작은 문에 도착할 것이다. 긴장한 채로 재혁은 열려있는 문을 손으로 잡고 문틈으로 오른쪽 눈을 들이밀었다.
사실 잘 보이지도 않았다. 창고는 어두웠고, 눈은 아직 어둠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자 실루엣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다. 한 덩어리의 실루엣. 재혁은 눈을 깜박였다. 저게 뭐지? 간신히 바닥에 붙은 것이 책상 다리인 것만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책상 다리를 알아보자 갑자기 전체적인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다리 앞에 남성용 구두를 신은 발이 보였다. 시선을 끌어올리자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다른 발이 또 보였다. 하얀 양말을 신은 발. 뭐지? 사람인가?
재혁의 시선은 양말을 신은 발에서 종아리로 무릎으로 벌어진 허벅지를 따라 올라갔다. 여자아이는 코를 훌쩍이며 울먹이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로 “하지 마세요.”, “싫어요.”, “그만해요.” 라고 말했지만 앞에 있는 사람은 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그만 둘 마음이 없거나.
여자아이는 책상에 걸터앉은 자세로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몸을 밀착시킨 채 여자아이의 말아 올라간 교복 치마 속, 벌어진 다리 사이에 서 있었다. 여자아이는 밀어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어두워서 선명하진 않았지만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옷을 붙잡고 있었다. 그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라 분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재혁의 귀에도 “우리 사랑…….” 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속삭이는 남자 목소리. 남자와 여자의 상체는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문틈으로 들어온 약한 빛으로는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남자가 다리 사이에 밀착해 있던 몸을 떼더니 여자아이의 왼 무릎 뒤쪽을 잡고 다리를 올렸다. 그와 동시에 여자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선생님…… 그만.”
가장 놀란 사람은 재혁이다. 선생님? 저도 모르게 문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문이 덜커덩거렸다. 아차. 덜컹거리는 소리에 비품실에 있던 둘과 재혁 모두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선생님이라 불린 남자가 여자아이의 다리를 들어 올린 자세로 고개를 획 돌렸다. 재혁은 잡고 있던 문을 놓고 뒤돌아 달려 나갔다.
뛰어나가는 발소리가 교무실에 울려 퍼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교무실 문을 박차고 복도로 뛰어나가 그대로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달렸다. 발이 빠른 재혁은 1층까지 단번에 내려왔지만 슬리퍼라 뛰기가 쉽지 않았다. 1층 현관에 아까 벗어놓았던 운동화가 보였다. 재혁은 운동화를 집어 들고 그대로 달려 나갔다.
학교를 빠져나온 재혁은 곧장 집으로 갔다. 집으로 오는 동안 긴장과 흥분으로 숨이 차올랐지만 어딘가에 멈춰 설 수가 없었다. 누군지 모르는 선생님이라는 남자가 뒷덜미를 잡을 것 같았다. 우당탕 거리며 집으로 들어선 후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쓰러지듯이 침대로 향했다.
젠장. 지금 내가 뭘 본거야.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 걸터앉은 재혁은 방금 본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여자애는 누구지? 아는 아이가 아니었다. 목소리와 실루엣만으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2학년이나 3학년인가? 그 남자는 누구지? 선생님이라고? 시간이 지나 흥분이 가라앉자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방금 그 장면은 전혀 섹슈얼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한 기분이 재혁을 휘감았다. 여자아이는 분명 싫어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거부 의사도 밝혔고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재혁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대체 누구지? 그들이 누구인지 알려줄 단서가 있지 않을까 싶어 다시 생각해봤지만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학교에 글러브를 놓고 왔다는 것을.
하지만 학교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다음날은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는 찐뽕글러브를 사용하기로 했다. 사촌 형이 준 글러브지만 찾으러 가자니 찝찝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재혁은 방 안 책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야구용품들을 내려다봤다. 머리가 무거웠다. 괜히 학교에 가서 글러브도 못 챙겨오고, 찝찝한 장면만 봤네. 사촌형한테 글러브를 받기 전까지 사용했던 파란색 글러브와 야구공을 집어 들었다.
휴대폰이 울린다. 아이들이 sns 메신저를 보냈지만 문교는 휴대폰을 볼 수가 없다.
재혁은 파란색 글러브와 야구공을 집어 들었다.
태호가 눈을 떴다.
효민이 눈을 떴다.
표건이도 잠에서 깼다.
하지만 아이들이 잠에서 깬 동시에 문교는 꿈에서 야구공을 떨어뜨렸다. 야구공이 발 아래로 떼구르르 굴러갔다. 야구공은 침대 아래로 굴러가더니 사라졌다.
가은이도 공을 떨어뜨렸다. 공은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팍! 하고 가죽이 터졌다.
“어?”
가은은 놀란 눈으로 바닥에서 터져버린 야구공을 바라보았다. 쪼그리고 앉아 야구공의 가죽을 손으로 잡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은은 혼란스러웠다.
갈피를 못 잡기는 문교도 마찬가지였다. 침대 아래에 손을 넣어 휘휘 저어보아도 공은 잡히지 않았다. 책장으로 가서 다른 글러브를 살펴보았지만 야구공은 없었다. 문교는 방 안을 서성이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은 sns 메신저에서 문교와 가은이 답을 하지 않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얘네 뭐야? 이런 꿈을 꿨는데 아직도 자고 있어? 왜 대답이 없어? 표건이가 문교에게 전화를 했다. 효민이 가은에게 전화를 했다. 하지만 둘 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표건: 야. 문교 전화 안 받아.
효민: 가은이도.
태호: 지난번에 나도 그랬잖아. 꿈에서 깨고 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아침이 되면 연락 올 거야. 걱정 마.
표건: 그건 그렇고 그 여자애 누구야? 아는 사람 있어?
태호: 아니. 얼굴이 자세히 안 보였어.
효민: 지난번 내 꿈에서 나온 여자애 아니야?
표건: 누구?
효민: 재혁이 앞에 서 있던 여자애.
태호: 아! 진짜?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표건: 와! 뭐야? 그런 거야? 남자는 누구야?
태호: 몰라. 선생님이라잖아?
표건: 어떤 선생이 학교에서 그런……. 미친 거 아니야?
효민: 그런데 재혁이는 왜 우리한테 그런 얘기를 한 번도 안 했을까?
표건: 그렇고 보니 그러네. 왜 말 안했지?
문교는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깐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깨어있는 기분이기도 했지만 어디로 흘러가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꿈은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다시 되풀이해서 보여주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는 암흑에 문교를 혼자 남겨두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꿈이라는 것을 인지하지만 도통 깨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교는 다시 학교에 있었다. 등교를 하고 5층 교실로 올라간다. 3층을 지나면서 금요일 오후에 계단 난간에 두고 간 글러브가 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 낡은 글러브를 누가 가져갔을까? 재혁은 고개를 숙이고 교실로 들어왔다. 터덜터덜 자리로 가는데 책상 위에 글러브집이 보였다.
‘어? 여기 있었네?’
재혁은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해 글러브집을 열어보았다. 검정색 낡은 글러브가 그대로 들어있었다. 어제는 근소한 차로 초등학생에게 졌다. 아무래도 경기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자꾸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도 했고 애지중지하던 이 글러브도 잃어버렸다고 체념했다. 그런데 이렇게 찾았다니. 다행이다 싶은 마음에 웃음이 났다. 잃어버린 줄 알았네.
글러브집을 다시 책상 옆 가방걸이에 걸어두고 의자에 앉았다. 하……. 하지만 안도감이 금세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글러브도 찾았는데 왜지? 뭔가 께름칙한 기분.
재혁은 이상한 기분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가방걸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글러브를 제외하고는……. 글러브.
재혁은 3층 계단 난간에 글러브집을 내려놓았다. 교무실에서 도망치며 나오느라 미처 글러브를 챙기지 못하고 1층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주말이 지난 오늘 글러브가 5층 우리 반, 내 책상 위에 올라와 있다.
글러브가 어떻게? 발이라도 달려서 알아서 주인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면?
누가 갖다 놓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