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파랑
적막.
누군가는 세상이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오직 고요함뿐이다.
아무 소리도 없는 세상.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사람.
나는 눈을 깜박인다.
행여 하나라도 놓칠까 주의 깊게 상대를 바라본다.
이모의 손과 입이 움직인다.
수화를 보면 쉽게 뜻을 이해하겠지만 나는 입 모양에 집중한다.
알고 싶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상대의 목소리가 궁금하다.
가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공공장소에 있을 때면 되도록 수화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모는 다른 사람들은 수화의 내용을 모른다고 하지만 어쩐지 나는 부끄럽다.
이모와 나의 대화를 다른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엿듣는 것 같아서.
버스 안에서나 지하철 안에서 상대방에게 귓속말하는 사람들.
그들이 부럽다.
귓속말은 언제 어디에 있든 그곳을 둘만의 공간으로 바꿔주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 하는 말로 서로의 귀를 간질이며 이야기하는 사람들.
키득대며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
저들은 귓속말로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들을까?
고개를 숙인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우회전한다.
덜컹거린다는 것은 버스의 움직임이지 결코 소리가 아니다.
버스가 급정거하던, 좌회전이나 우회전하던 나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 뒤로는 버스의 가장 뒷자리가 있고, 내 앞으로 두 번째 자리에는
교복을 입은 여학생과 남학생이 서로의 어깨를 닿은 채 앉아 있다.
남자아이가 창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자아이에게 귓속말한다.
여자아이는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다가 웃는 얼굴로 남자아이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인다.
저 입 모양.
간단한 말을 내뱉는 입술에 나는 집중한다.
정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진 않지만 “배고파?”라고 말한 것 같다.
어쩌면 내 상상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정답을 맞혔을지도 모른다.
남자아이가 고개를 돌려 여자아이와 눈을 맞추며 미소가 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귓속말.
별것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귓속말로 하는 걸까?
시선을 내리자 무릎 위에 올려 둔 내 두 손이 보인다.
두 손을 쫙 펴고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손바닥 위로 얼기설기 얽혀있는 손금들이 보인다.
“손금에는 사람의 운명이 적혀있대.”
이모가 아직 어린 내 손을 잡고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숨겨진 내 운명을 읽어보려 애쓰던 때가 떠오른다.
이 주름들로 운명이 결정된다면 내 기구한 운명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부모도 없이 이모의 손에 자라야 했던 내 운명을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까?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벽을 더듬어 아무 소리 나지 않는 하차 벨을 누른다.
타원형의 하차 벨은 내 손이 지나가자 빨간 불이 들어온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앉은 자리를 지나쳐 버스 뒷문을 마주 보고 선다.
우습게도 내 귀에는 무선 이어폰이 꽂혀 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어쩌면 무선 이어폰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너희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나는 듣지 못해.
물론 이어폰 때문은 아니지만.
뒷문에 있는 기둥을 잡고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서길 기다린다.
버스가 차선을 바꾸더니 속도를 늦춘다.
고개만 돌리면 저 앞에 내가 내릴 버스정류장이 보일 것이다.
교통카드를 찍고 바지 뒷주머니에 넣는다.
귀가 간지럽다.
서둘러 뒷주머니에 카드를 쑤셔 넣고, 무선 이어폰을 빼낸 후 귀를 문지른다.
그 사이 버스가 조용히 정류장에서 멈췄다.
문이 열린다.
귀를 문지르던 손을 떼고 버스에서 내린다.
오른쪽 귀는 여전히 간지럽다.
내리면 귓속에 손가락을 넣어서 긁어봐야겠다.
뒷문에 있는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온다.
버스에서 내려 인도로 올라서자 시선 끝에 버스가 보인다.
내 뒤로 아주머니 한 분이 함께 내렸다.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새끼손가락을 귓속에 넣고 몸을 돌리자 버스 문이 닫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버스 문은 중간에 한 번 멈추더니 다시 부드럽게 닫히고 있었다.
그때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무선 이어폰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정류장에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나는 재빨리 쪼그려 앉아 떨어뜨렸던 이어폰을 잡아 올린다.
버스 문이 닫히기 직전, 간지러웠던 오른쪽 귀 안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아주 작고 희미한 소리.
‘토스트.’
버스정류장에서 한 발도 떼지 못하고 나는 못 박힌 듯 서 있다.
지금…… 뭐라고?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고 좌우를 살핀다.
이게 무슨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내 허상이 만들어낸 소리일까?
소리?
소리라는 것이 애초에 나에게 존재하기는 했었나?
시선을 돌리지만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멍청하게 서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오른손에는 방금 떨어뜨렸던 무선 이어폰이 들려있다.
넋을 놓고 이어폰을 바라본다.
아니지.
이어폰이 귀에 꽂혀 있었던들 소리가 들리지 않지.
내 착각인가?
다시 귀를 기울이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간지럽던 것도 없어졌다.
토스트? 그건 누구 목소리였지? 나? 아니면 남자 목소리였나? 사람의 목소리는 어떤 느낌이지?
너무 진지한 내 모습에 순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제 익숙할 때도 됐는데.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나는 방향을 돌려 장애인지원센터가 있는 언덕진 곳으로 걷기 시작한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엄마는 나를 버렸다.
내가 갖고 있는 엄마에 대한 기억은 모두 이모가 말해 준 것뿐이다.
엄마라니. 참 오랜만에 생각난 단어이다.
오늘은 괜스레 감정적으로 되는 날인가 싶다.
엄마의 기억을 머리의 구석진 곳에 꾹꾹 밀어 넣고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기억은 구겨진 종이처럼 그대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 펴지려고 한다.
이러면 내가 꼭 상처받은 것 같잖아.
괜히 주먹을 움켜쥔다.
“언니는 백일도 안 된 네 귓가에 종일 시끄럽게 딸랑이를 흔들어줬지.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본인도 몰랐으니까.”
이모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입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럴 때면 난 어디로도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이모는 알고 있었다.
엄마 이야기를 해야 어린 조카가 가장 잘 집중한다는 것을.
이모의 말에 따르면 엄마 역시 청력이 좋지 않았다.
그건 외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줄 알았다고 했었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마흔이 조금 넘자 할아버지는 작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장애까지는 아니지만, 딸은 아버지보다 더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손녀는 아예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물려 줄 게 없어서 이런걸…….”
집중해서 보면 입 모양을 보고 대강 하는 말을 유추할 수 있게 되자, 보기 싫었던 말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나는 말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신체적인 결함과 이모의 훈련 덕분에 난 탁월한 능력을 탑재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이모는 괜찮아?’
어설픈 수화로 묻자 이모는 빙그레 웃으며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놨다.
“응. 다행이지. 나는 아무래도 할머니를 닮았나 봐.”
어린 시절이 그렇듯 이모와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모가 있어 다행이다.
이모가 아니었다면 난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한 채 혼자 버려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