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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Sep 13. 2022

당연한 듯 찾아오는 기적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좋아하는 꽃이 있니?' 라고 물어보셨던 적이 있었다. 사춘기 남자아이답게 당연히 꽃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기에 바로 '아니요' 라고 대답을 했다. 설령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남자답지 않고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대답을 들으신 선생님은 '감정이 메말랐구나' 라고 하시면서 '언젠가 꽃을 좋아하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란다' 라고 말씀하셨다. 


     최근 브런치에 한결같이 꽃에 대한 글을 올려 주시는 작가님이 있다. 그 분의 글을 읽다 보면 꽃 이야기와 함께 자주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소년 시절의 풋풋한 마음과 함께 그 당시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역시 인생의 가시밭길을 걸어 본 이후에야 꽃 그리고 추억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게 아닐까 싶다.    


     화씨 110도 이상의 불더위가 계속되던 애리조나의 여름도 이제 막바지를 고하고 조금씩 기온이 내려가고 있다. 10 월부터 4 월 사이 애리조나 피닉스의 날씨는 천국과도 같은데, 이를 잘 알고 있는 사막의 식물들은 이 시기 또는 여름이 끝나는 지금 시점부터 꽃을 피우고 무럭무럭 자라나간다. 


     집에 몇 종류의 식물들이 있지만 속물답게 열매를 맺고 쓸모가 있어 보이는 나무들 위주로만 지금껏 관리를 해 왔다. 뒷마당에 있는 오렌지-레몬 나무와 알로에는 매주 물을 주며 아끼는 태도를 보이지만, 앞마당에 있는 선인장에는 어지간해선 눈길을 잘 주지 않는다. 물을 안 주어도 잘 사는 종이기도 하고 맛있는 열매를 주는 것도 아니면서 거기에 귀찮음까지 더해지니 그냥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집주인의 무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친구는 올해에도 꽃을 피웠다. 선인장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신비한 느낌이 드는데 우선 그 빛깔과 화려함이 놀랍다. 밝은 햇살에 비친 이 꽃의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우며 사진이 실제 빛깔을 다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또한 꽃이 생각보다 튼튼해서 두꺼운 비닐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렸을 때 한국에서 보아왔던 꽃들과는 좀 다른 느낌이다.  

활짝 피기 전의 선인장 꽃


     활짝 핀 선인장 꽃을 꿀벌들이 참 좋아해서 매년 이 맘때가 되면 집 주위에 벌들이 종종 날아온다. 여러 군데 피어나는 오렌지나무 꽃 주위만큼 여러 마리가 한번에 달려들지는 않지만, 가져갈 것이 많아서 그런지 한 번 오면 꽤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  

활짝 핀 선인장 꽃. 열심히 일하는 꿀벌의 모습도 보인다.


     계속 내버려 두었던 미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꽃에 대한 감탄인지는 몰라도 이 친구에게 조금씩 애정이 가기 시작했다. 뭐 애정이 간다고 해서 딱히 무언가를 더 해주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차피 물을 안 주어도 사는 식물이니 아직은 그저 좀 더 관심을 갖고 자주 바라봐주어야 하겠다는 얄팍한 마음 정도가 고작이다.


      이 친구는 매년 이맘 때마다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매년 잘 피던 꽃이 어느 순간 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섭섭할 것 같지만 아직까지 이 친구는 한 번도 내 마음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 믿음직스런 친구를 위해서 이제부터는 그가 꽃을 피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기적'이라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밥을 먹고 소화를 시킬 수 있는 것도, 두 다리로 건강히 뛰어갈 수 있는 것 또한 '기적' 과 같은 대단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참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오랫 동안 문제없이 해 오던 일들은 어느덧 당연히 되어야 하는 일로 생각되고 감사의 마음이 사라진다. 인간 관계가 망가지는 주 원인 중 하나는 상대의 호의를 당연한 듯 생각해서이며 건강을 잃게 되는 원인 또한 내 몸이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이다. 


      오늘도 잠시 꽃을 바라보며 기억 속의 마음과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 일상이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더 특별히 여기기로 했다. 살아있음에, 건강함에 감사하며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특권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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