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방랑] 익산, 백제 최후의 전성기

익산 미륵사지-제석사지-왕궁리사지

by 파벽 Mar 13. 2025

2016년 2월 모일의, 무척 오래된 답사기.

당시 누군가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썼던 글입니다.

지금 보니 오래전이라 나름의 시의성이 있어 기록차원에서 올려둡니다.

-------


얼마전에 익산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먼저 미륵사지에 방문하였습니다.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복원하는 것은 아시고 계시겠지만,

지난 연말 사리를 재안치하고 심초석이 닫혔습니다.

봉안식을 못본것이 살짝 아쉬워요.

2009년에 미륵사지 서석탑의 해체복원과정중에 심초석이 열리고

그 안에서 사리공과 7세기 전반의 봉안물이 전혀 손타지 않은채 나오면서

세간이 발칵 뒤집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그 때 뉴스를 보면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던 기억이 있네요.

더구나 그 사리봉영기에서 삼국유사에서 나오는 선화공주가 아닌

'왕후 사택적덕의 딸'이 639년에 세웠다고 정확히 나오는 바람에

삼국유사 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받는 등 난리가 났었죠.

익산과 미륵사지와 관련 기록에 대한 더욱 정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그 면모가 확실히 드러나겠지만

현재로서는 무왕의 비가 꼭 한 명이겠냐,(선화공주와 사택적덕의 딸 모두 왕비라는...)

미륵사는 광대하므로, 선화공주가 미륵사에 대한 최초발원자이고 서탑 등 나머지 사역은 시간차를 두고 지어졌다,

당시 시대 정황 상 백제와 신라가 혼인관계를 맺는게 가당키나 한가, 역시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아름다운 설화일 뿐이다,

뭐 그런 여러가지 설들이 제기된 상태...

그러나 관련 연구는 사리공이 열린 후 와라락 나온 후

약간 소강(?) 상태에서 후속 연구들이 간간이 진행되는 것같고요, 아직 통설로 인정받는 것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륵사지 사리기는

저 위에 보이는 외호 안에 내호가 들어가고, 내호 안에 다시 유리로 된 사리병이 들어가고

그 유리병 안에 사리가 들어가는 구조입니다.

유리병은 부식되어 산산조각난채 나와서 원형을 복원하기 어렵다고 하고요.

사리호 안에서 수습된 각종 구슬들은 미륵사지 내 유물전시관에 현재 전시되어 있고요

사리는 새로운 사리기에 재봉안되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자면

저 위 사진에 보이는 사리 13과가 실제로 보면 모래알처럼 매우 작아요.

작년에 재봉안 전까지 전시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 사리와 깨진 유리병 사리기를 조사한 논문에 의하면

산산조각난 유리병 조각 중 병의 아가리 부분이 0 요렇게 남은 조각이 있었대요.

그 아가리의 직경을 재보면 저 사리 13과 중에 가운데 있는,

유독 작은 딱 1과만 통과할 수 있다는군요.

그에 따르면 진신사리는 오직 가운데 1과뿐인건데요,

불교계에서는 전체를 모두 사리로 보는 것도 같습니다.

진실은 저 넘어에.....^^;



 

다음은 제석사지입니다.

최근 지표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지고 멀끔이 정비되었습니다.

목탑지 위로 올라가면 기존에 깨져서 굴러다니던 목탑의 심초석이 자리를 잡고 있고요

탑이었으므로, 주변 마을분들에게 여전히 공양받고 계신 것같습니다.

사리공 내에 한 포의 공양미가 곱게 올려져 있습니다.


심초석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저 멀리,

사진에서 잘 안보일듯한데요;;

화살표 끝에 왕궁리5층탑이 보입니다.

... 보이시려나요.

두 절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여러 설이 제기되어 있지요.






다음은 근처의 왕궁리사지입니다.

왕궁리사지의 5층탑은 일제시대에 이미 심하게 기울어져 조사가 이루어진 상태고요

총독부에 수리비 요청이 올려진 상태였지만 여의치않다가

1965년에야 해체수리가 이루어지고 내부의 유물 수습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왕궁리 유물전시관에 왕궁리탑 해체수리와 관련한 사진 특별전이 열리고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한 번 가보시면 될 듯 합니다.

그 중 사진 몇 장을 아래에 소개드립니다.






왕궁리탑 출토 사리기 일체를 보면 아주 입이 떡 벌어지게 화려한데요

왕궁리탑은 드물게 안에서 사리공이 무려 다섯 개나 나왔습니다.

기단부에 3개, 1층 몸돌에서 2개요.

더구나 저 금(금동?) 경판은 그야말로 세간의 화제였다고 하지요.

저 사리병과 경판에 관련된 내용이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에 나오면서

제석사와의 연관성이 거론되었습니다.

제석사 목탑은 벼락을 맞아 깨끗하게 불타버렸는데요,

왕궁리탑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공을 조사하면 그 크기가 제석사 사리공과 일치한다고 하네요.

하여 제석사 목탑이 화재를 당한 후 제석사는 폐사되고 왕궁리탑을 세워 재봉안했다는 설이 현재 유력합니다.


물론 미륵사와 왕궁리, 제석사의 선후관계나 의미 등은

미륵사 터의 발굴과 좀 더 세심한 유물 조사가 이루어 져야

익산의 전체 면모로 드러날 것같아요.

현재는 익산이 대체 백제의 무엇이었느냐(천도예정지? 그냥 주력 도시??)부터도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 듯 하고요.


최근 익산을 비롯해 부여과 공주 등등 백제 관련 지역의 발굴이 활발해지면서

잭팟 터지듯 유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작년에 유네스코 역사유적지구로 지정되면서 정비도 더욱 깔끔이 이루어진 것같고요.

미륵사지 서석탑의 경우 완공될 때까지 일반인에게도 내부를 공개한다고 하니

시간내서 가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손하나 타지 않은 깨끗한 상태의, 심지어 연대와 봉안자까지 명확한

7세기 당시의 문자기록과 봉안물이라니, 저는 신기해서 몇 번이나 가서 봤답니다.

 

모쪼록 모두들 즐거운 답사들 되시길 바라며.





작가의 이전글 [티타임] 혹한엔, 러시아제 찻잔을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