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樂 4. 책 읽기와 문장 수집, 그리고 나의 독서 이력
어렸을 때 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20세기 소녀였던 나는 독서를 장려하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도서실의 규모도 작았고, 학급문고의 책은 집에서 몇 권씩 가져와서 채워졌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에는 '나의 길 가꾸기'라는 독서기록장이 있어서 책을 읽고 간단하게 한 쪽씩 기록해야 했다. 당시 내가 좋아했던 책들은 애거서 크리스티, 코난 도일의 탐정소설이 많았고 루팡이 나오는 책을 읽으며 홈즈가 미워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명작동화와 창작동화도 무척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기도 했다.
당시 교사의 부업이 가능하던 시절이라 담임선생님이 책을 판매하셨고, 가난한 부모님이 선생님을 도와드리려고 구입한 소년소녀세계명작동화 반 질은 내 영혼의 동반자였다. 각각 종이케이스에 담겨 있는 양장본의 두꺼운 책은 삽화도 아름다웠지만 내용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빨간 머리 앤 같이 유명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 이후에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유럽의 신기한 동화도 많이 섞여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그 책들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다. 어쩌면 그리움은 순수하게 책에 몰입하던 그 시간을 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국민학교 이후로는 책을 많지 읽지 않았지만, 집에 책이 좀 있는 편이라 어른들 책을 훔쳐보고 두근거리기도 했다. 고모가 읽다가 두고 간 책들이나 언니들이 읽던 무겁고 재미없는 책도 있었지만, 손바닥 같이 작은 삼중당 문고의 책 몇 권은 매혹적이었다. '제인 에어' 같이 마음에 드는 책은 되풀이해서 읽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문학서보다는 순정만화를 더 좋아했다. 황미나, 신일숙, 김혜린, 강경옥의 책을 천천히 곱씹어 읽으며 상상하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렇다 해도 고등학교까지는 문학소녀라고 할 정도로 책을 좋아했고 편지에 시를 베껴 적어 친구에게 보내기도 했다. 당시는 그렇게 낭만이 살아있던 시대였다.
그 이후로 문학의 암흑기가 왔다. 책을 읽으면 생각이 많아지고,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꼬인 것 같았다. 그냥 상식적인 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문학서를 멀리 하고 실용적인 책만 가끔 읽었다. 뭔가를 읽으면 대충 빨리 읽지 못해서 그것도 불만이었다.
마흔이 넘어서는 다시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에세이를 읽었고 특히 여행서를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 흥미를 가졌던 철학이나 문학보다 취향에 맞는 가벼운 읽을거리가 좋았다. 읽고 싶은 책은 많았지만 게으른 탓인지 도서관에서 잔뜩 빌려와 조금 읽고 반납하기 일쑤였다.
지금도 자신 있게 책을 좋아한다고 할 정도로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다독보다는 정독을 하는 편이다. 독서 수준도 그다지 높지 않다. 오히려 데일리 루틴으로 독서를 정해놓고 생각나면 인증을 할 정도로 의무감에서 책을 읽을 때도 있다. 독서는 다이어트처럼 꼭 해야 되고 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지속하기가 쉽지 않고 잘 되지 않아서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 말했다. 의무감으로 읽지 말고 좋아서 읽어야 한다고.
정말 좋아서 읽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은 것 같다. 글을 쓴다고 설치고 다니면서 책을 멀리할 수가 없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아름다운 문장에 매혹되고 작가가 펼치는 세계에 몰입되어 주변을 잊기도 했다. 글을 쓰는 것보다 글쓰기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이나 심리학 책도 좋아한다. 마음의 위로가 되고 생활의 기술을 가르쳐 주어 멘털 관리에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도서관에 가서 많은 책들을 훑어보고 서가를 거닐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주옥같은 문장을 찾아 수집하고 작가에게 반하기도 한다. 책 한 권 한 권이 다 하나의 세계고 책이 모여 하나의 우주가 된다. 그 안에서 나는 오늘을 살기 위한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