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 5. 드라마와 스토리 속에서 나를 잊는다
영화나 드라마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영화 마니아도 아니고, 1년에 극장을 겨우 한두 번 찾을까 말까 한 사람이지만 나름으로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는 음악처럼 취향을 많이 타는 장르인데, 나의 영화 취향은 그 스펙트럼이 넓은 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잔잔한 로맨틱 코미디, 블록버스터 액션, 스릴러, SF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고서는 잔잔한 일본 영화나 로맨틱한 옛날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나 '아웃 오브 아프리카', '인턴' 같은 영화 말이다. 물론 심심풀이로 OTT 서비스의 외국 시리즈물을 즐겨 보기도 하는데, 이런 드라마들은 보고 나면 여운이 없다.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뒷맛이 떫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쌓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머리 쓰지 않고 가볍게 볼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내가 영화를 처음 접했던 것은 어린 시절 낡은 흑백 티브이로 보던 명화극장과 주말의 영화를 통해서였다. 돌아가신 검은 터틀넥의 정영일 영화평론가가 나와서 영화를 소개해주면 얼마나 멋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안방극장을 주름잡았던 것은 벤허, 빠삐용,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 사운드 오브 뮤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영화였고, 오드리 헵번과 제임스 딘이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시절이었다. 악인도 그렇게 나쁘지 않고 어딘가 매력적이고 인간적이었던 시대. 어쩌면 악당이 진짜 나쁘게 느껴진 것은 흑백의 시대가 지나고 컬러 시대가 오고 난 다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 티브이에선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인기 있었고, 영화 관련 퀴즈 프로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심야의 FM 영화 음악실이었다. 영화 줄거리 소개와 함께 배우의 비하인드 스토리,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에 가끔 배우들의 대사도 들을 수 있는 영화 음악실은 말 그대로 낭만 그 자체였다. 영화를 많이 볼 수 없었던 시절에 영화음악실은 실제로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욱더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했다. 그 시절 주옥같은 영화 음악들이 참 많았지만, 엔리오 모리꼬네는 최고의 영화 음악가가 아니었을까.
20대에는 스크린이나 로드쇼 같은 영화 잡지를 보며 영화와 배우에 대한 환상을 키웠다. 잡지를 보면서 생소한 영화 용어를 사용하거나 예술 영화를 이야기하며 유식한 척 건방을 떨기도 했다. 그 기간이 길지 않았던 것은 영화보다 내 인생이 더 암울한 드라마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살지 고민하느라 밤을 지새울 때 영화와 영화 음악은 나에게 작은 꿈과 위안을 주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에 빠져 나의 현실을 잠시 잊기도 했다.
늦깎이 결혼하고 아이 키우느라 한참 동안 영화를 잊고 지내다 여유를 찾았다. 가끔 좋은 영화를 만나면 명대사를 기억하려고 사진을 찍고 블로그에 기록하기도 했다. 이제는 집에서 편하게 외국의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상하게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니 전처럼 영화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편이다. 언제든 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stop을 누르고, 더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찾아서 서핑을 한다. 영화제 수상작에다 평론가의 극찬을 받았지만 왠지 당기지 않는 영화가 있고, 잠깐의 기분 전환용으로 적합한 영화를 선호할 때도 있다. 가벼운 영화 취향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한 편은 영화를 봐야 하는 습성이 있다. 간혹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몇 시간이고 한 시리즈를 연달아 보기도 한다. 영화를 볼 때는 스토리에 빠져 잠시 나를 잊는다. 오드리 헵번이 되기도 하고 비비안 리가 되는 행복한 착각을 할 수도 있다. 지금 나에겐 영화란 일상의 윤활유이자 휴식이 된다. 우리 세대에게 영화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