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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경 Nov 17. 2022

난춘(亂春)을 쓰며

 대학교에 와서 난생처음 시 다운 시를 썼던 작품은 「문득이라는 곳」이었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문득이라는 신발을 신었습니다 걸을 때마다 똑, 똑 시곗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는 시간을 걷는 것이지요 시간을 문득, 문득 넘기는 것이지요”     


 이 시는 시간을 문득, 문득 넘기다가 겨울에 도착한다. 겨울에는 눈이 내려서 신발에서 뽀드득 소리가 난다는…… 그래서 시간을 넘길 수 없다는……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유치한 것도 같다. 하지만 이 시만큼 내가 시에 빠지게 된 이유를 명징하게 설명할 방법을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나는 삶을 문득, 문득 넘겼다. 무서운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오면 방문을 굳게 닫고 그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어떤 사건을 접했을 때 그 사건을 끝까지 응시하기보다는 그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시간은 문득, 문득 넘어갔고 나는 어른이 됐다.

 시를 쓰는 일은 내가 문득, 문득 넘겼던 순간을 공간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 순간이 문득 넘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반성하는, 슬퍼하는, 계속 기억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공간이 된다. 이 공간은 시간이 멈춰 있다. 나는 반복해서 사건 속에 있고 반복해서 이들을 떠나보낸다. 반복해서 애도한다. 반복을 멈추지 않는다. 문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2014년 4월     


 내 또래의 친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쉬는 시간에 핸드폰으로 계속 뉴스를 찾아봤다. 구조가 됐는지, 상황은 진전이 좀 됐는지 살폈다. 그리고 수업종이 쳤다. 지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말이.”     


 선생님이 우시던 모습이 내가 문득 넘기지 못할 공간이다. 시간이 언어로, 언어가 공간으로 나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 공간에서 나는 공감이라는 말을 배웠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공감하는 일에 대해, 누군가의 슬픔을 문득 넘기지 않는 일에 대해.          



 2016년 12월     


 촛불집회가 한창이었다. 거리가 촛불로 가득할 때 나는 고시원에 있었다. 내 삶이 망가지는 게 먼저였다. 당장 우리 가족들이, 내 여자친구가, 내 삶이 먼저였다.

 고시원 공용 부엌에서 공용 주방 칼이 보였다. 그때 손목에서는 핏줄이, 내 숨이, 내 불안이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너무 무서워서 밖으로 나갔다. 정처 없이 걸었다. 밖에서는 촛불 집회가 한창이었다. 나는 그 사이를 지나서 정처 없이 걸었다.          



 2020년 2월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홀로코스트 같았다. 사람이 사람한테 그런 짓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나도 그런 사람과 같은 성性이었다. 방 안에서 핸드폰만 봤다. 관련 뉴스를 계속 찾았고 현실을 알게 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 분노는 슬픔으로, 또 끝내는 나에 대한 부정이 되었다. 어느새 아침 해가 뜨고 있었다. 잠은 한숨도 못 잔 채 화가 났고 슬펐고 나를 부정했다. 내가 나를 자꾸 죽였다. 지구가 사라지면 어떨까. 지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죽으면 어떨까. 우선 나부터 상상으로 죽였다. 그러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그러면 적어도 나는 이 공간에 갇히게 되지 않을까.          



 2022년 4월     


 의식하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시를 써야 할 것만 같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게 내가 벗어나지 못한 날짜들을 적었다. 내 슬픔을, 내 발화를 있는 그대로 적었다. 그날은, 시를 다 쓰고 나니, 아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4월 15일이었다. 내일은 4월 16일이었다. 내가 시를 쓰게 된 이유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난춘(亂春)」을 쓰기 시작한 건 아마 2014년 4월 16일부터였을 것이다. 이 시는 2014년 4월 16일부터 쓰여서 2022년 4월 15일에 완성됐다.           



 나는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기보다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시를 쓰는 사람이 되는 건 창작자로서의 욕심이 생기게 된다. 더 좋은 결과를 내고 싶고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시를 읽기 바라게 만든다. 근데 내가 진짜 좋아하고 존경하는 시인은 시인이기 전에 문학을 하는 사람이다. 문학은 예술이기 전에 학문이어서 나를 더 낮은 위치에 두고 내가 더 연구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나는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는 일도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상처를 비웃지 않는 일도, 예리한 공감의 감각을 만드는 일도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를 쓸 때마다 나를 그 공간에 두고 온다. 그때의 ‘나’는 그 공간을 지켜주길, 내가 혹여나 그 공간을 잊을 때면 가끔씩 나를 혼내러 찾아오길. 모든 순간의 ‘나’들이 내 뒤에서 나를 감시하길. 내가 그 공간을 이탈할 때면 내게 중력이 되어주길. 내가 문득 넘기지 못하게 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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