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는 시간

첫 번째 봄

by 새봄

학창 시절, 나는 늘 책과 가까웠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방과 후면 도서관에 가곤 했고 심지어 토요일에도 도서관에 방문하곤 했다. 어린아이들이 느끼는 공간감에 맞춰 만들어진 단차를 밟고 올라가면 창문을 통해 넓은 운동장이 보였고, 겨울이 되면 작은 도서관은 난방으로 인해 바닥이 따뜻해 책을 읽기 좋았다.


도서관에 잠깐 들러 책을 빌리고 바로 향한 곳은 논술 학원이었다. 학원에 다닌 지 10년이 넘은 기억이지만, 선생님께서는 아파트 한 호수 (학원 겸 자신의 거주 공간이다)의 작다면 작은 공간에서 우리들을 맞이해 주셨다. 가장 넓은 방 한 칸에는 책으로 가득했다. 고전 소설부터 만화책까지,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까지 풍성해졌다. 책을 잠시 읽고, 간단한 주제와 함께 원고지에 글을 끄적이고 있으면 선생님께서는 준비해 두신 주스와 과자를 가져다주시곤 했다. 때때로 책을 읽어주시기도 하였다. 우리 집에서 한 층 아래였던 학원이었기에 시간이 비면 학원으로 가 책을 빌리고 반납한기억이 생생하다. 대리석 바닥과 백색 조명이 아닌 나무 위 카펫과 어딘지 모르게 나름 정감 가는 아파트의 조명처럼 내 취미는 그렇게 익숙하게 찾아왔다.


중학생 때는 머리가 복잡할 때면 도서관으로 갔다. 국어 시간에는 1주일에 한 번 책을 읽고 도서관에서 독서록을 쓰는 수업이 있었다. 반에서 거의 모두가 싫어하던 독후감을 적는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고 독후감을 쓰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생각을 책을 활용하여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또는 싫어하는지, 이번 주에는 무엇을 했는지 등등을 적다 보면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러면서 건축을 좋아하는지 몰랐던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공부를 하느라 내가 좋아했던 책을 온전히 읽지 못했던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대학교에 진학하여 건축학과 학생으로서 새로운 시작의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은 ‘내가 좋아했던 공간’이다.


아니, 아예 공간이라는 개념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 학원, 집을 오갔기 때문에 나의 활동 반경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서울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의 기억들에만 의존하여 ‘그 공간은 그랬지’라는 단편적인 생각들로만 가득 찼다. 예를 들어 보자면 어릴 적 방문했던 롯데월드는 매우 큰 곳이었고, 광화문은 집에서 멀게만 느껴졌다. 오목교역 또한 한 학기에 한두 번 친구들과 놀러 갈 때 가는 특별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롯데월드는 작아 보이고 광화문은 집에서 30분만 가도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며 오목교역은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려고 할 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다.


갓 스물을 넘겼을 때, 나는 내가 살던 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했다. 성인이 되어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가고 확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곳은 망원동이었다. 망원동은 내가 자라온 동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여서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다양한 소품샵과 원두의 로스팅 향기가 가득한 카페들이 들어서 있었고, 그 옆에는 오래된 시장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주에 한 번은 망원동에 갔다. 어떤 날엔 잠봉뵈르를 포장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소품샵에서 작은 도자기 그릇을 사기도 했다. 혼자 정처 없이 걸어 한강에 도착할 때도, 때로는 아끼는 친구들과 한강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망원동은 요즘 말로 하면 - 나의 애착 동네 - 가 되었다. 망원동으로 인해 도시만이 가지는 분위기가 있다는 걸 서서히 깨닫기 시작할 때 즈음, 망원동을 넘어 다른 곳으로도 발을 넓혀 갈 수 있게 되었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로 가고 싶어 하는 곳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던 중 이유 없는 답답함이 밀려왔던 날이 있었다. 망원동에서 얻은 여유와 새로운 기운이 나를 이끌어 도망치듯이 한강 가운데 표류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던 노들섬으로 갔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가고 싶었다. 노들섬을 보기 위해 한강대교를 건넜는데 수심을 알 수 없는 한강물을 보며 이유 없는 공포감과 두려움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애써 마음을 정리할 즈음에는 어느새 섬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곳은 망원동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위한 공간이되어주었다.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도서관 비스무리 한공간이 나왔다. 안의 카페에서 좋아하는 카페 라떼를 포장해서 책을 읽다 보니 한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탁 트인 층고에 주변은 녹음과 물결의 파랑에 비친 윤슬로 가득했다. 어쩌다 보니 노을까지 보게 되었고 마음이 나름 괜찮아진 상태로 다시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망원동에서의 새로움이 내 안의 ‘공간’의 개념을 넓혔다면, 노들섬은 그 넓어진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장소였다. 공간이란 그런 것이구나 싶었다.



하루하루 새로움을 주는 공간에서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는 시간은, 떠밀리듯 살아온 내가 잃어버린 조각들을 미래의 내가 ‘헨젤과 그레텔’처럼 주울 수 있도록 남겨 두는 일이었다. 그렇게 남겨진 조각들은 내가 지나온 시간을 되짚게 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모든 것들에 감사함을 느끼게 했다. 잊고 있었던 그 어린 날의 순수한 감정과 생각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곳에서의 순간들은 단순한 일상의 기록이 아닌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의 일부였음을, 이 글을 쓰며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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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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