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함경아 (Kyungah Ham, b. 1966)

by 정물루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북한 사람이었나 보다. 북한은 나에게 늘 낯설고도 이상하게 친숙한 세계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누군가의 감정, 습관, 믿음, 두려움. 모든 것이 나와는 아무 접점이 없는데도, 묘하게 그냥 마음이 간다. 그래서 탈북자들의 책이나, 유튜브에 올라온 인터뷰 영상은 자주 찾아보는 편이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한 탈북자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남한에 온 지 몇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정일이나 김정은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두려웠다고 했다. 탈북했지만, 평생을 절대자에 대한 충성과 믿음 속에서 살아온 그에게 세상을 다시 보는 일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반복적인 리서치와 교육, 스스로의 내적 트레이닝을 거친 후에야 그는 고난과 억압의 근원이 ‘지도자’에게 있었음을 받아들이고, 비로소 세상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 기간이 6개월 이상이 걸렸다고 하니, 브레인워시가 한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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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아는 회화, 설치, 영상, 자수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보이지 않는 권력’과 ‘침묵의 정치’를 시각적으로 드러내온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다. 특히, 폐쇄된 북한 사회와의 실질적인 연결을 시도한 자수 프로젝트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어느 날 집에 우연히 날아 들어온 삐라를 보게 됐어요. 삐라는 체제의 프로파간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그걸 본 뒤 나도 삐라를 보내야겠다 싶었죠.”


그녀는 인터넷조차 닿지 않는 고립된 세계 속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외부 세계의 목소리를 전달해야겠다는 절박함에서 자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디지털 이미지와 정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고립된 세계가 있다는 현실이 그녀의 예술적 본능을 건드렸다. 단지 문제의식을 갖는 것과, 그걸 실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지만 말이다.


북한은 자수라는 매체가 특히 활성화되어 있는 나라다. 국가수반이 방문하면 자수를 선물로 받을 정도로 전통적으로 권장되는 장르이기도 하다. 함경아는 북한 내부로 작업서를 전달하기 위해 중국에 거주하는 중간책을 통해 자신의 디지털 이미지를 보낸다. 이들은 다시 북한 자수 장인에게 전달하고, 그렇게 한 땀 한 땀의 수작업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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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내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함경아 작가는 도안 속 이미지들을 추상화하거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문구로 포장 해야 했다. 정치적인 메세지가 아니라, ‘당신도 외롭습니까?’처럼. 하루 종일 앉아 자수를 놓는 작업자가 반복적으로 이 문구를 읽다 보면, 마음 어딘가에 다정한 파장이 일기를 기대하며.


검열에 걸려 작품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걸 검열하는 사람부터 작업자까지, 여러 명이 적어도 이 이미지와 문장들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시작했다.


“1만 걸음이 필요하다면, 그중 9,999걸음은 결정된 것 하나 없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전혀 불가한 상태로 걷는 것”


작가는 그렇게 북한과의 자수 작업을 묘사했다. 일정도, 진행도, 완성 여부도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긴 기다림 속에서 완성된 자수 작품들에는 복잡한 색채와 패턴, 문구들이 숨어 있다. 그중 하나인 ‘we fell in love’는 2018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을 두고 했던 발언에서 따온 문구다. 비꼼과 유머가, 자수라는 느리고 정성스러운 매체로, 북한 사람들에 의해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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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이후 남북 관계는 더욱 단절되었고, 이 프로젝트 역시 멈춘 상태다. 가장 자유롭고 솔직해야 할 예술이, 국가의 정책 변화에 따라 중단된다는 현실이 답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술로 이 시대를 기록하고, 감정의 결을 건드릴 수 있다면 - 1만 걸음 중 단 한 걸음의 확신만으로도 계속 걸어갈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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