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아 태닝(Dorothea Tanning, 1910-2012)
1910년 생이, 2004년에 첫 시집을 출간했다.
미국 초현실주의 화가, 도로시아 태닝의 이야기다.
2004년이면, 그녀는 90세가 다 된 나이다. 시집의 제목도 <A Table of Content>, 그러니까 ‘목차’다. 평생을 화가로 살아오다, 80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94세에 시집을 냈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요즘 세대도 아닌, 1910년생 여성의 스토리다.
대학을 졸업하고 약 20년간 광고회사에서 공간 기획 일을 하며, 처음에는 즐거웠다. 있어 보이는 명함, 타이틀, 이메일 주소, 그리고 비슷하게 있어 보이는 사람들과 일하며 착각했다 - 나는 멋진 일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매일 하는 일은 메일함을 확인하고, 보내기를 반복하는 일처럼 느껴졌고, 메일을 제외한 글쓰기는 하지 않게 되었다. 좋아하던 책은 멀리하고, 열심히 출퇴근을 하며 겉으론 부지런해 보였지만, 나는 누구보다 내가 점점 게을러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Keep your eye on your inner world and keep away from ads, idiots and movie stars.”
— Dorothea Tanning
“너의 내면세계에 눈을 고정하고,
광고, 멍청이들, 영화배우들 같은 외부 자극은 멀리해.”
도로시아 태닝이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겉만 반짝이는 것에 휘둘리지 말라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경쟁도, 남의 인정도 아닌, 내면을 향한 집요하고 아름다운 여행을 하라고. 나에게 집중하라고. 그리고 그녀는 그런 삶을 살아내며, 직접 보여주었다, 내가 벤치마킹할 수 있도록.
도로시아 태닝은 1910년에 태어나, 101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약 70년에 걸쳐 예술 작업을 이어간 초현실주의 작가다. 회화로 시작해 조각, 문학까지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며, 꿈같은 장면 속에 문, 해바라기, 소녀 같은 기묘한 모티프들을 담았다. 무의식과 꿈, 그림자처럼 가보지 않은 세계의 본질을 탐색했다. 독일 출신의 초현실주의 예술가였던 남편,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와 결혼해 애리조나 세도나에서 자연과 심플한 삶 속에서 영감을 나누며 살았다.
자기 내면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작업하는 예술을 통해 그녀는 스스로를 치유하며, 자유롭고 충만한 삶을 살아간 듯하다. 어둡고, 기묘하고, 이상한 그녀의 작품들과는 달리, 작업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태닝의 해바라기들은 이상하게 괴물 같거나, 무섭게 생겼다. 보통 해바라기는 빛과 희망, 생명을 상징하지만, 그녀의 해바라기는 너무 크거나, 소녀들 곁에 위협적으로 등장하거나, 공간을 침범한다. 밝음의 상징조차 뒤틀리면 무서울 수 있다는 걸 말하는 듯하다. 그 해바라기는, 어쩌면 여성에게 강요된 밝음과 순수, 순응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것이다.
태닝은 꿈과 상상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예술과 문학으로 세상에 꺼내 보이며 말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 중요한 걸 찾아보라고.
그녀의 어두운 그림들을 보면 볼수록 묘하게 흥미롭고, 귀여워 보이고, 힐링까지 된다. 보이지 않는 내 진짜 모습을 자꾸 꺼내다 보면, 언젠가 시집을 출간할 90세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왠지 지금보다 더 귀여운 내가 되어 있을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