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내 인생 목표 중 하나는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정한 척도, 말뿐인 다정함도 아닌, 마음 깊이 타인을 공감할 줄 아는 사람. 하루는, 내 롤모델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일단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나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40년 넘게 살아왔는데 다정한 한 사람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다정한 사람이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 듯하다.
그래, 최근에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생활 속에서 만난 인연들이니까, 시간을 거슬러 초등학교(아니, 국민학교) 시절로 가보았다. 성당에 다니던 시절, 전례부에서 미사 사회를 맡던 나는 신부님과 수녀님과 개인적으로 만날 일이 많았다. 그 두 분을 떠올리니, 이상하게도 그분들이 내게 하신 말씀들보다는 말하는 나를 바라보며 웃으며 들어주시던 얼굴이 먼저 생각났다. 분명히,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다정한 사람이란 내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다정(多情)’은 한자어로 ‘마음이 많다’, ‘정이 많다’는 뜻이다. 말 한마디, 눈빛, 손짓 하나에도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상태. 말투나 행동에서 배려와 온기가 느껴지는 태도를 말한다. 이런 다정함을 갖기 위해서는 상대방과의 공감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공감이란, 그 사람의 마음을 알고자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니까,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잠시라도 그 사람이 되어보려는 태도 - 그게 다정함의 시작이다.
콜롬비아 작가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는 전쟁과 사회적 억압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설치 예술가다. 제3세계 곳곳에서 직접 경험한 전쟁, 인종차별, 계급 폭력 같은 혼돈과 부조리를 감각하고, 그 감정을 조용히 조각한다. 도리스의 작업들을 보면서, 아주 최근의 참혹한 현실이 겹쳐졌다. 2023년 10월부터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속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매일 목숨을 잃고 있다. 어제는 단 하루 동안 아이들만 45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런 숫자는 단지 ‘사실’ 일뿐이다. 죽은 아이들의 부모와 가족들이 느끼는 마음을,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도리스는 2003년 이스탄불에 약 1,550개의 중고 나무 의자를 골목 사이에 빽빽하게 쌓아 올린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수많은 전쟁과 이주, 추방의 역사를 품은 도시 이스탄불에서, 그녀는 구체적인 죽음을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애도의 공간을 만든 것이다. ‘하루에 아이 45명이 죽었다’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5월 18일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나는, 이동훈이라는 소년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무너지는 마음을 따라가며, 아들의 죽음을 함께 겪고 있었다. ‘수많은 희생자’가 아닌, 이동훈이라는 이름과, 그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는 엄마의 감정을 공감하며.
이어령 교수님은 말했다. 벽돌은 하나 빠지면 다시 채울 수 있지만, 돌은 하나 없어지면 그 자리는 평생 비어 있게 된다. 우리 사람 하나하나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희생자’가 아니라, 그저 아이 하나하나가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한 기본은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일’인 것 같다.
두바이에서는 청소해 주는 분들도, 시큐리티도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끼리 모이면, 여기에서도 이름 대신 직위나 직책이 호칭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거나 직책이 바뀌면, 그 호칭도 사라지고, 결국 이름도 잊힌다. 다른 사람이 같은 자리에 오면, 같은 호칭을 가진 전혀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남에게 불리기 위해 만든 이름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불러주면서 ‘당신은 중요한 사람입니다’라고 무의식 중에 계속 상기시키는 것 - 그게 다정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믿는다. 사실 나는 남의 이름 기억하는데 소질이 없다. 앞으로는 써보고 외워보고 자꾸 불러보려 한다. 그렇게, 조금씩 다정해지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