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 스며드는 K-컬처
보통 사고나 교통 체증 구간, 또는 국경일을 안내하는 도로의 LED 전광판에 어느 순간부터 한국 국기와 UAE 국기가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Welcome, President of Korea!라는 문구와 함께였다. 한두 군데만 환영 메시지를 띄우는 줄 알았는데, 운전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훨씬 자주 보였다. 그리고 버즈칼리파를 포함한 LED 스크린이 있는 빌딩 외벽에도 비슷한 환영 문구들이 계속 노출되었다는 SNS 포스팅이 왕왕 보였다.
한국이 UAE에게 이렇게 중요한 나라였나?
'두바이 겨울'인 한국의 가을 날씨가 약 4개월 정도 이어지는 11월은 이곳에서 이벤트가 쏟아지는 시즌이다. 그 시작점에, 한국 대통령과 여러 인사들의 중동, 아프리카 순방 일정이 UAE에서 출발했다. 대통령 방문과 함께 아부다비와 두바이에서는 각종 정부·B2B 미팅뿐 아니라 K-컬처 관련 행사들이 연달아 열렸다.
UAE 대통령궁에서도 매일같이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었고, 나는 어쩌다 한-UAE 문화교류 행사에 현지 예술가 몇 명과 함께 초대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행사에 대한 사전 정보는 많지 않았고, 다만 시큐리티 체크를 위한 개인정보 확인 절차만 여러 차례 진행됐다. 두바이에서 아부다비의 대통령궁까지는 차로 약 1시간 반. 아부다비 시내를 지나 바닷길을 따라가면 궁이 보이는데, 그 바닷길을 따라 UAE 국기와 태극기가 쭉 걸려 있었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아부다비에서 이렇게 많이 본 적이 있었던가?
대통령 부부뿐 아니라 이재용 회장, 조수미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예술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화려한 대통령궁에서의 공연, 그리고 에마라티 예술가들과의 합동 무대를 보며, 해외에서도 이렇게 환대받는 한국이, 참 기특하고 고마웠다.
오랜 기간 해외에서 지내면서 한국 대통령을 직접 본 건 중학교 시절 홍콩에서였다. 토요일마다 한국 학생들이 다니던 한인 토요학교에 노태우 대통령 부부가 방문한 적이 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이었는데, 전 대통령이 방문한 셈이었다. 방문 이유는 몰랐고, 그저 ‘전 대통령은 키가 크구나’, ‘부인이 참 예쁘다’ 정도의 인상만 남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홍콩 신문에서 좋지 않은 뉴스들만 봤을 뿐이다.
중국 시안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에는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 이야기를 중국인들로부터 유독 많이 들었다. 왜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중국인들이 그에게 보여주던 존경의 분위기가 꽤 컸다. 정치나 사회보다 나 자신의 정체성 혼란이 더 큰 문제였던 그때의 나는, 외국인들이 한국 대통령에 이렇게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두바이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세월호 사고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 관련 뉴스가 매일같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작년 이맘때, 계엄령 논란이 불거지자 아이들 방학으로 온가족이 한국에 놀러가 있던 우리 싱가포르 아가씨네 가족부터 두바이의 외국인 친구들까지, 한국에서 전쟁이 난 줄 알고 메시지가 쏟아졌었다.
이번 이재명 대통령의 UAE 방문에는 여러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UAE 내 K-City 건설 협의였다. 어디에, 언제 완공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공식적인 코리아타운이 이 땅에도 생기게 되는 걸까. 괜히 기대가 된다.
하지만 이번 대통령 방문이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한 번 크게 소란스럽게 하는 행사가 아니라, 생활 속에 스며드는 한국 문화가 자리 잡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일본의 키노쿠니아 서점처럼.
UAE에서 가장 큰 서점은 미국도 영국도 아닌 일본의 키노쿠니아다. 서점 자체가 많지 않은 UAE에 두바이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두바이몰에, 아부다비에는 가장 럭셔리한 몰인 더갤러리아몰에 키노쿠니아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 작년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후 한국 책의 영어 번역본도 눈에 띄게 늘었다. 하지만 일본 책 코너의 규모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일본어 서적, 문구류, 망가 시리즈까지 비중 있게 자리잡고 있다. 일본 문화에 관심이 없어도, 다른 책을 사러 갔다가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와 마주하게 된다.
나는 한국 문화도 이런 방식으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이벤트성이 강하고 한국 문화만을 체험해볼 수 있는 홍보관이나 전시 보다도, 키노쿠니아같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외 문화와 함께 한국을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생기면 좋겠다. 시끄럽게 버즈를 일으키지 않고 잔잔하게 스며드는 일본 문화를 보면, 얄밉고 부럽다. 한 번의 화려한 파티보다도, 꾸준하게 자주 만나는 것이 그 관계를 더 단단하게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