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직장인의 두바이 해외이주기

출장 인생 끝에 시작된 정착의 기록

by 정물루

그러니까 출장을 계속 다니게 되면 안 좋은 점은 체력 저하만이 아니었다. 가장 크게 흔들린 건 인간관계였다. 일 년에 출장만 열두 번. 아무리 짧은 일정이라 해도 한국을 오갔다 갔다 하다 보면, 중요한 행사나 약속에 맞춰 한국에 ‘있을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는 삶이 된다.


일단 연애 생활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인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고, 다른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지금처럼 온라인이나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예 외국에 거주하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중요한 행사나 기념일에 자주 불참하는 사람은 서로에게 꽤 불편한 존재였다.


밤샘과 출장에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기쁨 위에 이런 현실적인 불편이 겹쳐졌다. 그래서 조금 더 많은 리소스를 투입할 수 있는 대형 광고회사로 이직도 해봤다. 하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일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탑다운 방식의 조직문화 자체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또 한 번 분명히 느끼게 됐다. 그 무렵이었을까. 번아웃인지, 사춘기인지 모를 시기가 찾아왔다.




그래서 해외 취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에게 맞는 조직문화, 조금 더 자유롭고 쿨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먼저 어릴 때 거주했던 경험이 있고 지인들도 있던 홍콩의 잡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이십 대의 모두가 바쁜 시절, 나를 위해 잡 오프닝을 알아봐준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온라인이 발달하기 전, 해외 취업을 직접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꽤나 챌린징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예전 회사에서 같은 팀으로 일했던 대리님에게 연락이 왔다. 중동, 두바이에서 회사를 차려 몇 년째 운영 중인데 일이 많아져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영어를 할 수 있는 디자이너와 프로젝트 매니저가 필요하니 혹시 소개해줄 사람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남자 직원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과 함께.


두바이라니. 수많은 출장지 중 하나였다. 2008년 1월, 두바이에 프로젝트가 있어 일주일 정도 머물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막이 있는, 뜨거운 중동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꽤 추웠다. (중동에 겨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시절이다.)


비도 왔다. 동남아 우기처럼 비가 쏟아졌고, 길은 금세 물바다가 됐다. 배수 시설이 참 후지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마침 몇 년 만에 미국 전 대통령 부시가 두바이를 방문하던 시기라 도시 전체가 비상에 걸렸고, 도로와 길이 모두 차단됐다. 그 때문에 미팅이 있던 건물에 무려 여덟 시간이나 갇혀 있었던 기억도 있다.


그동안 진행했던 미국의 여러 도시 - LA, 라스베이거스, 워싱턴, 시카고 - 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불편하고, 비효율적인데, 처음 겪는 일들이 계속 생겼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 상상과는 다른 장면들. 그런데 묘하게 정이 갔다. 영어도 자유롭게 통했다.


산 하나 없는 풍경 속에서 노을 질 무렵, 해가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장면을 끝까지 볼 수 있다는 것도 이상하리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차가 많지 않았던 도로, 어디를 가나 사람이 많지 않아 널찍하게 느껴지던 공간, 허허벌판 같은 풍경 한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이쑤시개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지금의 버즈 칼리파. 당시 이름은 Burj Dubai였다. 프로젝트 도중 자금 문제가 생기며 아부다비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그 대가로 아부다비 국왕의 이름, 칼리파를 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Burj는 아랍어로 탑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 두바이의 탑이 세워져 있었다.


주변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 건물을 대체 왜 짓는 건지, 여름엔 얼마나 더 더워질지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상상할 수 없다는 매력이, 내가 두바이를 좋아하게 된 이유였던 것 같다.




그 ‘예전 대리님’에게 해외 이주 계획을 솔직하게 설명했고, 이번엔 두바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언어는 그저 영어만 할 수 있으면 가능했다. 그렇게 자력으로 처음 해외 이주를 하게 되었고, 그 뒤로 13년째 두바이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도 내 출장 인생은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역마살이 사주에 있는 게 맞는 듯하다.) 다만 이번엔 출장지의 결이 조금 달라졌다. 가까워진 유럽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걸프 지역, 중동의 여러 나라들 -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땅들,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이국적이고 낯선 공간과 사람들, 문화 속에서 직접 보고, 겪고, 살아보는 경험이 쌓였고 그만큼 수많은 에피소드도 따라왔고.


2015년 5월, 이집트 카이로 출장 중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9화사춘기 총량의 법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