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게 출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지난 주 브런치북을 일주일 스킵한 이유는 '파리 여행' 때문이었다. 두바이는 지난 주 부터 아이들 Winter Break가 시작됐다. 무덥고 긴 여름 방학에 비하면 아주 짧은 3주지만, 이곳 두바이에도 겨울 방학이 있고 겨울도 있다. 휴가를 낼 수 없었던 남편은 두바이에 잠시 홀로 남겨두고 나는 아이 둘과 함께 친정엄마와 파리에서 만났다. 엄마한테는 첫 프랑스 여행이었고 우리 아이들한테는 두번째, 그리고 나한테는 N번째 파리 여행이었다.
이번 파리 여행이 N번째가 된 이유는 내 출장 커리어때문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주전공인 중문과와 복수전공인 영문과를 살려 한국의 대기업 해외마케팅 부서에 외국어 특기생으로 취업했다. 0000 사번 공채로 입사해, 신입사원 연수를 꽤 오래 받았다. 연수원 생활과 OJT(On the Job Training)까지 약 6개월 동안 회사에 대한 ‘사랑’을 배우고, 업무를 익히고, 동기들과 선배들을 알아가는 긴 신입사원 시기를 보낸 뒤에야 부서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회사 생활은 아니었다.
탑다운 방식의 조직 구조, 경직된 분위기, 보고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업무들. 나 같은 외국어 특기생을 왜 뽑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회사원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내 인생에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치 사춘기가 늦게 찾아온 것처럼, 방황이 시작됐다.
‘회사원의 삶이란 모두 이런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대학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언니의 회사에 잠시 놀러 가게 됐다. 분명 회사인데, 빌라를 개조해 만든 ‘집’ 같은 사무실이었다. 책도 많았고, 다들 편한 옷차림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연구하는 분위기였다. 잠을 못 잔 사람도 있어 보였지만, 대학생 같기도 하고 회사원 같기도 한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대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던 그 언니는 국내외 전시를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연봉은 대기업에 다니는 나보다 훨씬 적었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학 시절 디자인 전공으로 편입을 준비한 적도 있었고, 외국어 전공도 살릴 수 있는 일이라면 이보다 더 잘 맞는 직업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국의 브랜드와 상품을 해외 전시를 통해 알리는 회사를 찾아 이직을 결심했다. 회사를 알아보고, 지원하고, 면접을 봤다. 신입 기준으로 대기업 연봉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때 이직하지 않으면 평생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못 할 것 같았다.
회사 HR에서도 몇 번이나 말렸고, 동기들도 용감한 결정이라면서도 연봉 차이가 너무 크다며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새 회사에서도 일의 강도는 더 높고 연봉은 낮은 환경이었기에, 내가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다들 의심스러워 보였다.
주변에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냥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어렵게 찾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연봉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다시 큰 회사로 돌아가면 되지 - 라는 생각이었다.
아마도 큰 책임이 없던 이십 대였기에 가능했던 이직이었을 것이다. 이직 후의 삶이 늘 즐겁기만 했던 건 아니다. 그래도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또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이십 대는 끊임없는 출장 라이프로 채워졌다. 유럽, 미국, 동남아, 일본, 중국까지. 세상에 이렇게 해외 전시가 많은지도 몰랐고, 해외로 진출하고 싶어 하는 한국 브랜드가 이렇게 많은지도 처음 알았다. 고객사는 한국이었지만, 대부분의 일은 해외 파트너들과 함께해야 했기에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며칠 밤을 셀 수 있을 만큼 즐거웠다. 잠은 비행기에서 자면 됐으니까.
그렇게 두바이로 이직하기 전까지의 이십 대는 한국에서 해외로 향하는 출장의 연속이었고, 두바이로 이직한 후의 삼십 대는 다시 두바이에서 또 다른 해외로 이동하는 시간들로 가득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