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 무능력자
날씨가 서늘해지는 11월이면 두바이는 매년 'Fitness Challenge'라는 캠패인을 연다. 도시 곳곳에서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그중 가장 인기 많은 종목은 달리기, 바로 '두바이런, Dubai Run'이다.
도시 고속도로인 셰이크 자이드 로드를 막고 5km, 10km 코스를 달리는 미니 마라톤이다. 두바이 왕자인 셰이크 함단도 참여하면서 인기가 더 높아졌다. 귀엽고 선한 인상의 그가 여러 스포츠를 즐기다 보니 더욱 호감형으로 자리 잡았고, 왕자를 한 번 볼 수도 있고 그가 달리는 길을 함께 달릴 수 있으니 참여비도 없는 이 행사에 사람들이 몰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두바이몰,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버즈칼리파 앞부터 시작해 왕복 12차선이 넘는 도로를 달리거나 걸을 수 있는 경험이니, 두바이런의 인기는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올해 대회는 바로 오늘 아침, 11월 23일 새벽 6시부터 시작되었다. 셰이크자이드 로드는 새벽 3시부터 아침 10시까지 전면 통제. 올 초 1월부터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한 나는 아이들을 포함한 우리 가족 넷, 그리고 동생네 부부와 함께 두바이런에 등록했고 어제 배번호를 찾으러 갔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꽤 붐볐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달리기를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은 몸매의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나도 러너 특유의 단단한 근육질 스타일은 아니지만, 배가 많이 나온 사람들, 뒤뚱뒤뚱 걷는 사람들까지 - 여기에 지옥 같은 주차장 상황까지 더해지자 슬슬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대중교통이 불편한 두바이에서, 두바이몰까지 어떻게 가야 하나 찾아보다가 그제야 리뷰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두바이몰에 차를 세우고 마라톤 입구까지 지하철을 타면 되지만, 지하철 탑승에만 최소 한 시간, 대회 후 지하철로 주차장이나 다른 역까지 이동하는 데는 두세 시간 걸린다는 후기들. 달리기보다 셀카와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위해 참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러닝 대회’라고 생각하고 참여했다가는 실망한다는 말들도 많았다. 이전 사진들을 다시 보니 두바이 도시 마케팅을 위한 행사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사실 나는 ‘체육 무능력자’였다.
국민학교 시절 체력장은 내게 악몽이었다. 운동신경이 없기도 했지만, 단거리, 장거리 달리기부터 철봉 매달리기까지 모든 걸 점수와 등수로 줄 세우는 방식은 ‘너는 체육 무능력자!’라고 매년 각인시키는 시스템 같았다. 체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이나 자신감을 키워주기보다, 오히려 운동에 대한 두려움만 심어줬다. 다른 과목 시험은 자신 있었지만, 체육만큼은 나의 확실한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러다 중학교 때 아버지 해외 발령으로 홍콩의 국제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그곳에서는 운동이 단순한 체육 시간이 아니라 그냥 삶 자체였다. 방과 후 수업도, 체육 시간도, 주말도 온통 운동으로 가득했다. 몇 달을 제외하면 1년 내내 여름인 홍콩 아파트에는 대부분 수영장이 있었고,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할 것 없이 아이들은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다.
운동신경이 좋은 동생은 특히 인기가 많았다. 영어를 잘하지 않아도, 공부를 잘 못해도 운동만 잘하면 금방 친구를 사귈 수 있었기에 주변엔 늘 사람이 북적였다. 국민학교 시절 체력장의 슬픈 기억에도 불구하고 나도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운동을 해야 했고, 운동 포비아였던 나는 운동 근처를 맴도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해갔다. 운동을 잘 못해도 그 주변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반감과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때 처음 ‘운동도 하다 보면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생겼으니, 나에게는 엄청난 변화였다.
오늘 새벽 두바이런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뒤, 어젯밤 7.5km를 달렸다. 존투(Zone 2) 러닝이라 불리는, 비교적 낮은 심박수를 유지하며 달리는 방식이다. 무리하지 않고 길게 달리며 스태미나를 키우는 훈련이라고 들었다. 작년에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는 3km도 못가서 가슴이 터질 것 같고, 발목과 무릎 부상도 겪고 우여곡절이 많았다. 치료도 받고 여러 방법을 찾아가며 무리하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법을 배웠고, 요즘도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꾸준히 뛴다.
몸은 생각과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달리면서 느낀다. 야외에서 달리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나무 냄새, 자연 냄새를 맡으며 도파민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기분이 든다. 숨은 차도 기분은 점점 좋아진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운동이 중요하니 체력을 키우라고 굳이 체력장까지 만들었나 보다. 아이들이 워낙 많았던 시절, 모두를 한꺼번에 평가하고 관리하려다 보니 나온 시스템이었을 것인 듯하다.
요즘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은 운동을 잘하든 못하든, 운동 근처에 머물 시간과 여유가 거의 없다고 한다. 반면 이곳 두바이의 아이들은 내가 홍콩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운동이 삶의 50%를 차지한다. 잘하든 못하든 그냥 삶의 한 부분이다. 어차피 모든 걸 잘할 수는 없지 않나?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움직이다 보면, 내 생각과 감정도 더 자주, 더 많이 움직여 건강하고 즐거워지는 것 같다. 체육 무능력자였던 나도 할 수 있는 달리기를 주변 사람들에게도 권하게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