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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윰 Sep 18. 2023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와, 나는 오늘을 '산'다

지독했던 알러지 비염과 축농증에서 해방됐다. 세상이 흐리게 보였었는데 일요일부터 조금은 맑아보이기 시작했고, 오늘은 오랜만에 몸이 조금 가볍다. 일본 도쿄로 떠났던 게 8월 18일. 그전부터 썩 마음과 몸이 좋지 않았지만, 루틴을 이행하며 버텨오던 것이 여행을 계기로 폭발해버렸고... 골골거리다가 이제야 괜찮아졌다. 딱, 1달 만의 일이다. 나는 또 다시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와 오늘을 '살아' 있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이따금 한다. 결론은 언제나 같다. 모르겠다는 거다. 세상 밖으로 내던져져 눈을 뜬 순간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 거의 없다. 바스라진 조각처럼 이따금 떠오를 뿐, 특히나 암울했던 초중고 시절은 지금의 내게는 전생과도 같이 느껴진다. 그만큼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과 같이 약 1달의 터널 시기를 거칠 때면, 때로는 1-2주의 터널기를 거칠 때면 느끼게 된다. 성격은 바뀌었을 수 있으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민감하고 예민한, 그래서 더 배려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본질적으로 남탓을 잘 못해서 오히려 내탓하는 게 편한, 내 행복을 쫓아가기보다 그냥 남이 즐거워하는 얼굴을 보는 게 기이하게 익숙한 사람. 그렇다고 내가 엄청 봉사주의자거나 감성적인 사람이냐 하면 아니다. 나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때로는 냉담하리만큼 비관적이다. 그 모든 비관의 비관의 끝을 달린 끝에야, 어차피 살아야 하니까... 그럼에도 세상은 돌아가고 나는 숨을 쉬고 있으니까 <긍정>을 취하는 것이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나는 낙관주의자다. 


마지막에는 언제나 희망을 보려고 한다. 세상을 사는 인간이란 <가능성>에 기대어 있기 마련이니까. 오늘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모레가 조금은 나아질 거라는 작디 작은 소망 말이다. 아주 힘들었던 시기에 나는 죽음 충동이 일 때마다 내게 속삭였다. 뛰어내리는 건 좋지 않아. 자칫하면 다리만 으스러진 채, 바보가 된 채, 반편이로 살아가야 할지도 몰라. 차에 뛰어든다는 건 좋지 않아. 역시나 한방에 죽긴 어렵고, 그게 무슨 민폐야.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어딘가에 줄을 매단다는 것도 썩 마음에 차지 않았다. 죽음이란, 이 생애의 끝을 다한 '수명 끝'의 죽음이라도 다른 이의 도움을 받게 마련이니까.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다른 이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 민폐를 우리는 민폐라 생각하지 않는 것뿐. 또한, 민폐로 성립되지 않는 것이 어차피 망자는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혼은 육신을 떠났고, 그 텅 비어버린 육신을 수습해주는 일이야 남은 자의 몫이다. 그리하지 않고는 남은 자들이 현생을 살아갈 수 없어서다. 허니, 장례라는 것은, 망자를 떠나보내는 일이란 것은 비단 망자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산 자를 위한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거듭하며 나는 이날 이때까지 살았다. 십대 때부터 지독한 울증이었는데 나는 울증인 줄도 몰랐다. 우울할 시간은 없어서다. 내겐 할 일들이 많았고, 1등을 해야만 했고, 나의 존재가치를 스스로에게 증명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너무나도 무기력해지기 때문에, 한계에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갔고 번아웃 증세를 끝없이 겪었다. 어쩌면 이러한 습관이 '무기력'을 불러온 건지도 모른다. 즐기면서, 나를 돌아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만은 물론 할 수 없겠지만 적당히 좋아하는 것도 해주면서 살아야 지치지 않는 법인데 나는 쉬어가는 법을 몰랐다. 물론, 즐기는 법도 잘 몰랐다. 내 세상엔 '해야할 것'들로 가득했고 지금도 그렇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몇 년만에 <해답>을 갈구하듯, 혹은 피난처를 찾듯 갈급한 심정으로 병원을 찾았다. 그 병원에서 나의 끝없는 <해야한다>라는 마음도 강박의 일종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속이 후련했다. 나는 <하지 않는> 나를 비난했지만, <해야하는> 나를 칭찬해준 적도, 격려해준 적도, 토닥여 준 적도 없다. 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상태'이고, 하지 않는 것은 '멍청한 상태'라 생각했는데 하지 않는 것도, 그 상태로도 괜찮다는 것처럼 느껴져 좋았다. 


다만 하지 않는 것은 '무기력'으로 떨어지기 일쑤라 나는 내가 '무기력'하게 널브러진 꼴을 못 보는 사람이었던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병원에서는 '하지 않고' 그냥 있어보는 연습을 해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그 뒤로 정말 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았고 글을 열심히 쓰지 않았고 책을 보지 않았다. 유튜브를 계속 봤는데 주로 타로나 다큐멘터리였다. 드라마 하나를 겨우 간간히 봤지만 딱히 집중하진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다 보니 정말로 질리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도, 타로도, 사이다썰과 같은 이야기들도 질리더니 나도 모르게 영어 공부 관련 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영국식 영어를 하고 싶어서 줌 과외를 시작하고는 진짜 최소한의 것만 하고 있어서다. 원래라면 최소한의 것만 하는 내게 엄청난 분노를 느끼고 스스로 수치스러워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최소한의 이해만 하고 그 다음에 차근차근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 <해야만 하는 것>을 <노는 것>, <재밌는 것>, <즐기는 것>이라 생각하기 위해 무의식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중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전보다 노래를 덜 중독적으로 듣는 편이다. 이전에는 책을 읽는 것도 마치 스피드 싸움인 것처럼 하는 통에 책 읽기에 흥미를 잃었다. 그래서 이제는 차근차근 읽히는 대로, 읽히는 만큼, 읽고 싶은 것을 읽으려 한다. 다만 너무 안 정해두면 중구난방이어서 조금은 정해둘까 하는 중이다. 역시나 글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야 뱉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의 한 달간 괴로웠던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인생무상> 때문이었다. 


어쨋거나 치열하게 살았는데 현 주소가 이모양 이꼴이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이 모양 이꼴이라는 걸 들여다 보니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직장이 있고 월급이 들어오고 엄청 빡센 환경은 아니다. 토할 만큼 미치게 일하던 시절의 내가 보면 비웃을 정도로 편안하다. 다만, 여러가지 이슈가 있었고 사람의 문제도 있고 커리어적으로 'next'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경이어서 이직을 해야하는 것뿐이다. 안주하면 이직을 하지 않아도 무관하다. 그러니 이직을 하겠다!!!라고 화를 내면서 준비하고 떨어질 때마다 우울해하는 게 아니라 괜찮아 보이면 내고 떨어지면 말고, 하는 식으로 해야 한다. 


나는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둘 수도 없고,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어차피 망할 것을 알면서 해나가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사실 회사 일이라는 게 그런 거다. 대체로 그냥 타성에 젖은 채로 일하며 그러지 않는 사람은 갈려나가다가 아프다. 갈려나가지 않는 이들은 조금 더 열정적으로 일해서 임원을 달거나 승진한다. 그런데 나는 회사 일에 그 정도의 열정을 쏟고 싶지는 않다. 그러기엔 내게 다른 꿈이 있어서고, 현타를 잘 느껴서다. 어쨋거나.. 열심히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다, 앞으로 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가장 컸다. 


그런데 세상이란, 사람이란 어차피 내가 해준 것들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게 섭리다. 


그렇다면 알아볼 만한 사람한테나 좀 더 신경써서 잘해주면 그뿐이다. 아닌 사람들에게는 '에너지'를 최소한도로 해야 한다. 단, 회사에서는 사람을 가리면 티가 나니까 회사에서는 모든 이들에게 저전력 모드, 회사 일에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써야한다. 그렇대도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열심히 하는 걸 테다. 약 8년간의 회사 일을 하면서 알았다. 내 안에는 에너지가 많고, 기준치가 꽤 높은 편이며, 욕심이 많다. 나에게 있어 '대충'이란 없고 그건 일을 제대로 해본 사람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어떠한 일이든 착수하는 순간부터 에너지가 들게 마련이다. '대충'이 적용될 수 있는 건 혼자 밥을 대충 해먹을 때밖에 없다. 그것도 에너지가 들겠지만.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1.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2. 나는 평화주의자다. 

3. 일에 있어서만은 완벽주의자다. 

4. 세상 모든 사람과 일은 이해하려면 못할 것이 없다는 걸 안다. 

5. 나는 매순간 타인, 일을 이해하는 데 에너지를 썼고 내 마음은 돌아보지 못했다. 

6. 나는 예민하고 민감하며 촉이 서 있는 사람이다. 

7.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어하며 거짓말을 못한다. 

8. 최대한 둥글게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다혈질'이다. 

9. 나는 세상을, 일을, 생활을 '전투'하듯이 해왔다. 

10. 나는 스스로를 엄청나게 채찍질했다. 

11. 나는 해낸 것은 만족하지 못했고, 언제나 더 높은 '목표'를 내게 하달했다. \

12. 지금껏 나는 나라는 이름의 간수와 함께 '일지옥'에 갇혀 살았다. 

13. 일이란 돈벌이 수단이지,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14.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 별로 없다. 

15.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배려를 받아도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16. 인류애는 가지고 살아가되, 개개인에게 신경쓸 필요는 없다. 

17. 굳이 내가 나설 만한 일은 없으니, 앞서나가거나 총대를 맬 필요도 없다. 

18. 아무리 거지 같은 일 안에서도 배울 점은 있고 심지어 즐거운 포인트도 있다. 

19. 내가 죽는 날까지 하고 싶은 건 결국 글을 쓰는 것이다. 


20. 글쓰는 게 재밌는 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한 <세계 창조>여서다. 

21. 나는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좋다. 

22. 나는 비극적 혹은 긍정적 '아이러니'를 좋아한다. 

23. 한때 나는 <신념있는 또라이> 캐릭터를 좋아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24. 나는 지금 <이 세상의 밑바닥>을 보고서도 겸허히 제 할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 좋다. 

25. 멸망하는 세상에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종류의 사람이 재미있다.

26. 이왕이면 그가 그 세상을 멸망케 한 자이자, '필멸자'여도 좋겠다.

27. 인간의 운명은 그가 어떠한 사람이건 간에 같다, 인간은 필멸자(반드시 멸하는 자)다. 

28. 죽음을 향해 매순간 걸어가는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왜일까, 이게 내 오랜 질문이다. 

29. 단지 소설, 드라마, 영화 같은 콘텐츠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30. 인간 개개인이 살아가는 인생이 곧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31. 사람들은 모두가 제각각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살아간다. 

32.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사람들은 자신만의 '이야기'(개별 에피스드가 포함된 책)를 만들어간다.

33. 인생이란 한 권의 책과 같으나, 대다수의 인생은 동일하게 반복된다. 

34. 반복되는 인생사의 무료함을 자신과는 다른 생을 사는,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캐릭터를 보며 해방된다.

35. 캐릭터는 반드시 호감일 필요는 없으나, 반드시 공감이 가야한다. 

36. 공감 가는 캐릭터를 만날 때 사람들은 대체로 '감정적 이입' 때로는 자신과 '동일시' 한다. 

37.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투비 창작자다, 매순간 <시뮬레이션>하기 때문이다. 

38. 면접을 앞두고 면접상황을 예측해본다거나 하는 작은 시뮬레이션부터 큰 미래에 대한 상상까지 한다. 

39. 사람들은 자신이 바로 주인공이며 동시에 '창작자'인 인생을 살아가나 인생사는 대체로 무료하다. 

40. 인생이 무료한 이유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41. 인간은 인생 대다수의 시간을 '돈벌이' 하기 위해, 일터에서 보낸다. 

42. 유사 이래 가장 전쟁이 적은 현 시점에 <판타지>나 환상이 가미된 콘텐츠가 인기 있는 건 그 이유다. 

43. 콘텐츠(이야기)는 무료한 인생의 탈출구이자 유희거리이며 동시에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44. 때로 어떠한 사람들은 문학, 영화, 드라마, 인문학, 철학 등 도서를 읽고서 자신의 인생 경로를 바꾼다. 


45. 이야기 창작에 대한 욕망이 강한 사람들은 세상을 다층적으로 바라보는 일을 즐긴다. 

46. 실생활에서도 창작자들은 자신 주변의 사람들을 '캐릭터'화하여 관찰한다. 

47. 창작자의 작품 속에 나오는 캐릭터는 실제 주위 사람들의 여러 면모를 섞어서 창조한 것이다. 

48. 창작자가 가장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무수한 사람들이 '즐겁게' 읽어주는 것이다. 

49. 두번째로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정서, 마음, 선택, 생활에 조금의 변화라도 있는 것이다. 

50. 세상에의 관찰, 매혹적인 캐릭터의 창조, 재밌는 스토리텔링 이 3가지가 나는 즐겁다. 



쭉쭉쭉 쓰다보니 예상치 못한 경로로 정리되었지만 어쨋거나 결론적으로 나는 <스토리>를 즐긴다. 세상 그 어떠한 것보다 <스토리>가 재미있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재미있는 걸 해나가기 위해서는 이 무기력과 울증과 약한 조울 그리고 강박에서 해방되는 게 좋다. <~해야만 한다>라는 표현은 가급적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보련다. 나는 참 이 표현을 많이 쓰는 거 같다. 


일단 많은 건 욕심내지 않고 나는 식습관, 생활습관에서 루틴한 건강을 찾으려고 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요절한 천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생활하는 작가로 살아야 한다. 소설쓰기는 내게 취미이며, 언젠가 '큰 부'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리 욕심내지 않는다. 욕심 안 냈는데 빵! 터지면 더 행복하니까. 나는 돈벌이를 해야 하고, 글을 꾸준히 쓰면서 즐길 것이다. 허니 단편이 1달 안에 완성될 이유는 없고, 장편 역시 마찬가지다. 몇년이 걸릴 지라도 꾸준히 써나가는 게 중요하다. 죽는 순간에 길이 남을 명작을 남길 수도 있는 문제다. 


나는 한때 <날 것>은 죽은 자들의 세상엔 없고, 나는 육회나 육사시미, 생선회와 같은 날 것을 정말 좋아하니까 죽을 수 없다, 내일의 회를 먹기 위해서!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웃었다. 씁쓸하나 나름의 유머가 담긴 미소였다. 나는 이제 <이야기>의 시뮬레이션을 산 자 들의 세상에서 돌려보고 싶다고 생각해본다. 죽은 자들의 세상에도 이야기가 있을 수 있겠으나, 지금의 컨디션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육신에 담겨 있는 상태로 오욕을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욕을 느끼는 이 육신 상태로 계속 <이야기>라는 걸 만들어보겠다. 무료하고 무미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캐릭터에, 사건에, 이야기에 열광하고 클라이맥스와 결말 즈음에 스스로를 돌아보거나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게만 되도 좋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나는 요즈음 죽음과 샤먼, 무당에 꽂혀 있는데 이전에는 '극적인 전개'에만 몰두했다면 지금은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결국 이 세상도, 이야기도 '사람의 것'이다. 


차근차근 생각해야겠다. 일단 이번주의 목표는 아침 6시에는 일어나는 것이다. 일찍 자는 편이어서 아침에 일어나서 스트레칭하면 기분이 좋은데, 한동안 못했다. '하루의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서' 나 스스로 일상을 '즐기기 위해서'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책을 읽겠다. 우선 여기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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