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마음먹은 후 갖게 된 고민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에서 살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었다. 당시엔 내가 직장을 잃은 지 좀 됐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시기이기도 했었다. 우선 시골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컸고 그럴듯한 집을 지어서 아이와 즐겁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내게는 집을 지을 돈도 없었고, 심지어는 직장도 없었다.
천천히 처음부터 생각을 정리해보자니 우선 뭘 하고 먹고살지를 해결해야했다. 그 당시에 꽂혔던 생각 중 하나는 혼자서 살면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힘드니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모여 사는 곳,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곳을 찾아가면 낫지 않을까였다. 그래서 아이와 같이 어느 한 공동체 마을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곳은 생활과 교육이 함께 이루어지는 공동체였다. 주로 공동작업을 통해서 마을 재정을 마련했다. 공동작업은 대부분 농사일이었고,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수확이 많든 적든 간에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고 있었다. 그 공동체는 외부에 조금 알려져 있는 곳이어서 손님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이었는데 그렇게 찾아간 손님들도 묵고 있는 동안은 마을의 공동작업을 함께 해야 했다. 내가 찾아갔던 때는 가을 갈무리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때쯤이어서 작업할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콩 고르기라든가, 시금치 캐기, 메주 만들기 같은 작업들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합심해서 그 사람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데 황토 초가집 형태로 대부분 한가족당 방 한 칸 정도의 집을 갖게 되는 것 같았다. 그 집은 그야말로 방만 있어서 부엌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는데, 굳이 부엌을 짓지 않아도 되었던 이유는 마을 공동시설에 부엌이 있어 매 끼니를 모두 거기서 같이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박 3일 동안 그들과 같이 먹고, 자고, 일하면서 아이와 함께 나름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하지만 막상 일상을 같이 할 생각을 하니 선뜻 마음 먹기가 쉽지 않았다. 모두 모여 살며 힘든 일도 나누고, 기쁜 일도 나누는 공동체 생활은 꽤 괜찮아 보였지만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선택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아이와의 단란한 식사시간을 갖기 힘들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집이라는 공간을 떠올리면 밥 짓는 냄새부터 떠올리게 된다. 친구들과 놀다가, 또는 공부하다 지쳐서 돌아간 집에 엄마가 짓는 밥 냄새, 나물을 무치느라 들이부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온 방에 가득 차 있을 때면 뭔가 평안하고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동네 아이들과 해가 저물도록 골목에서 놀다가 멀리서 ‘얼른 저녁 먹게 들어와라!’하고 외치는 엄마 목소리에 모든 놀이를 멈추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던 때가 어린 시절을 대표하는 기억으로 오버랩된다. 나는 먹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내 성장기 시절 친구들에게 엄마의 음식 솜씨는 나의 자랑이기도 했다.(나는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살았다.) 시간이 흘러 내가 엄마가 되니 신기하게도 엄마가 해주었던 맛의 기억을 잊지 않고 내 아이에게 비슷하게 해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이를 낳고 이유식을 시작으로 해서, 입맛을 형성하는 3, 4살 시기에도 아이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것을 기쁘게 여겼으며, 한참 성장기를 맞이한 아이가 밥을 두세 그릇 뚝딱 할 때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여주기 위해 직접 김치를 담가 보기도 했다. 식재료도 아이의 건강을 위해 한살림 같은 친환경 생협 물품을 이용했고, 텃밭에는 흔한 비료 한 번 뿌리지 않았으며 환경에 관심이 많았던 이유로 비닐도 씌우지 않아 매년 풀과의 전쟁을 신물 나게 치러야 했다. 그렇게 유난스러워 보이게 살았던 이유는 아이가 평생을 살아야 할 신체를 만드는 유년기 시절엔 먹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동시에 아이가 유년시절을 기억하는 냄새로 엄마가 차려주는 밥냄새를 평생 간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고 그래서 아이에게 밥을 차려주는 것은 내가 엄마로서 누리는 최고의 낙이었다.
요리를 하는 과정은 가능하면 아이와 함께 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요리라는 것을 즐겁게 느끼고,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모든 과정을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방학이 되면 점심은 스스로 만들어보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요리의 재료를 함께 수확하는 일, 재료를 다듬는 일, 직접 요리해 보는 일 등을 적절히 같이 해보았다. 아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편식이 조금 있는 편인데, 특히 생채소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은 일부러 간을 봐달라고 청해 한입이라도 먹어보게 해서 맛에 대한 경험을 해보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봄이 되면 뒷산에 진달래를 따서 화전을 같이 만들어보기도 하고, 쑥을 뜯어온 날엔 아이가 좋아하는 쑥 튀김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여름엔 오디나 토마토 등을 갈아서 얼려 먹기도 했다. 특히 팥을 삶아 우유랑 같이 갈아서 얼려 아이스바로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렇게 해놓은 팥아이스바는 사실 아이보다 내가 더 맛있게 먹었었다. 가을엔 동네를 돌아다니며 제법 실하게 열린 대봉감을 찾아내 집에 가지고 와 곶감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직접 만들어 먹었던 곶감이 내가 살면서 지금껏 먹었던 곶감 중에 가장 달콤하고 맛있었던 곶감으로 기억한다.
아이랑 밥을 해 먹는 일은 항상 그렇게 쉽고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일이 고단해 밥을 하기 싫을 때도 있었고, 반찬거리가 똑 떨어져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할 때도 많았으며 일이 늦게 끝나 그 시간에 밥을 해서 먹자니 잠자는 시간이 애매해져 버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밥을 사 먹고 집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아이는 그렇게 오랜만에 하는 외식도 매우 좋아했다. 특별히 더 달달하고, 엄마 음식보다 더 자극적이며 보기에도 화려한 음식들은 아이가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더 자주 찾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다 크도록 엄마 음식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고 맛있게 잘 먹었는데 스스로 배달 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는 어느 날 ‘오늘은 엄마 음식보다 OO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어.’라는 아이의 말에 살짝 섭섭하기도 했다.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 참으로 많은 음식들을 만들고, 심지어는 내가 먹어보지 못한 것들도 만들어 보기도 했는데 다양한 음식들을 만들고 먹어보면서 아이와 지냈던 시간들은 내가 엄마와 겪었던 음식에 대한 향수만큼이나 특별하고, 행복했던 기억이다. 집에서 나는 음식 냄새는 아이를 도덕적인 아이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아이가 재능이 뛰어나거나 특별한 아이로 크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건강하고, 모든 사람과 잘 지내며 그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아이로 크기를 바랐는데 아이는 엄마의 바람대로 잘 성장해 있는 듯 하다. 매일 하루 세끼, 평범한 일상과 먹거리가 아이를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로 키우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 이유다.
아이는 어릴때부터 편식이 있었다. 나는 골고루 먹이기 위해 숱한 노력을 했지만 고기반찬에 대한 여전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어쩌다 한 번씩 만들어주는 고기반찬을 보면 ‘엄마! 사랑해~’ 하며 평소 잘하지도 않는 사랑 표현으로 나를 쑥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다는 아이의 전화 한 통에 무슨 맛있는 것을 해주면 사랑한다고 말해줄까 일주일 내내 행복한 고민들을 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