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원색적인 순간을 담다
내게 한 가지 좋은 습관이 생겼다.
글을 꾸준히 쓰면서 나에 대해 돌아보고 인정하게 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나는 내가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을 찾았다. 누굴 만나든, 어떤 상황이든 나는 대부분 어떤 물음에도 "괜찮다"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되뇌는 수준이었다.
물론 정말 괜찮을 때도 있었다.
괜찮을 거라고 내가 생각하면 상황이 나아진다고 판단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면서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을 명칭 하는 단어가 있었다.
나를 처방하는 것 같았다.
억압이라는 말 자체가 다소 강했지만, 나는 이를 배려라고 포장했던 사람이었다.
그저 미운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아이의 심리를 나타내는 사전적 정의도 있다.
이를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 일컫는다.
부모와 정서적인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한 아이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면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 ‘착한 아이’를 연기하게 된다.
부모에게 관심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뛰고 싶어도 뛰지 못하고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다고 한다.
대인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더 멋지고 예쁜 사람이 되어야 기억할 거라 여겼다.
착한 아이를 연기하는 것
그 속앓이에는 ‘착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한다’는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면 보상 심리가 있었나 보다. 어느 순간 나는 친구들에게 항상 좋은 말만 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대체 좋은 사람의 기준이 뭐길래
착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 너의 눈치를 보는 것, 그리고 너의 요구에 제법 순종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필수였다. 나는 그만큼 네가 많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내 의견은 곧 간섭일 때가 많았다.
노력이 지나칠 때도 있었다. 이는 더 크게 날 실망했다. 나의 내면은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고 희생하면서 따라온 작은 우울증의 씨앗을 느꼈다.
나의 배려에 따라올 관심을 구걸하기도 했다.
그렇게 너를 위해 나를 잠시 잃어버렸다.
오늘부터
나의 괜찮음을 다르게 해석해보기로 했다.
언제나 밝고 명량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작은 것까지 양보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이면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규칙과 명령은 다르니까 괜찮았다.
그렇다, 난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저 상황을 좀 더 일관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려진 두 눈으로 미움받을 것에 늘 도망가는 내 모습도 싫어졌다.
피노키오의 코는 거짓말을 할수록 이상하리 만큼 길어졌다. 나는 내가 나를 감출수록 상대방과의 거리 또한 멀어져 간다는 것을 몰랐다. 감정 표현이 솔직할수록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버릇없음과 무관하게 부정적인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피노키오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