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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운가.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도 올바로 보지 못한다

by 페트라

인간의 부러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부러움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 날개를 타고 와 나의 몸을 예리하게 비집고 들어옵니다.




저도 친구들이나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과시를 종종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부럽지가 않어’라는 노래를 예로 삼아 너스레를 떨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저의, 조금은 부러운 감정을 숨기곤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축하해’, ‘행복하겠네’ 정도이지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부럽지가 않다면 솔직한 마음 표현이 아니겠지요.

그저 남들보다 부러움을 덜 느낄 뿐입니다.

‘그래. 난 부럽지 않다. 자랑할 필요도 없다.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도 아니고 그냥 나답게 살자’라고 되뇌곤 합니다.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본 글을 메모해 둔 적이 있습니다.

K리그 축구 심판 정동식 님의 인터뷰였습니다.

손흥민이나 김민재가 부럽지 않나라는 질문에 그는 대뜸 답합니다.

“전혀! 그들에겐 그들의 삶이, 내겐 나만의 삶이 있다. 행복지수도 그들 못지않다고 생각된다. 우선 월드클래스라는 압박감이 내겐 없지 않나”




저는 소유보다 저만의 경험을 중시합니다.

새로 배우는 것,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는 것 등등등

그저 부러움에 그쳐 저 자신이 초라해 보이거나 시기 질투심을 느꼈을 때 흔한 표현 그대로 부러우면 지는 것이지요.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화만 돋우거나 스스로를 재단하여 내가 왜소함을 느끼게 합니다.

심지어는 패배감에 허덕여서 누가 밀지도 않은 수렁에 갇히고 맙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부러울 때보다 부러움을 받았던 때가 더 많았던 듯합니다.

공무원으로 산 저의 삶이 그랬고, 그리고 55세를 끝으로 세 아이 모두가 사회에 진출해 있었던 점은 특히나 남들의 부러움을 많이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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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경구에서 질투가 얼마나 낭비적 요소인지를 확인해 봅니다.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도 올바로 보지 못한다’




오래전 본 <질투의 화신>이라는 드라마는 보통의 인간들이 질투로 인해 자신의 삶을 망쳐버리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나라 사람 모두와 심지어 일본에서도 추앙받는 성웅 이순신을 향한 선조의 열등감과 시기 질투는 가히 톱클래스감이지요.

이순신 장군께서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신 것은 스스로의 운명을 알았기에 죽음을 택하셨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니까요.




부러움에 대해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내가 부럽다고 느끼는 사람도 누군가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기업 총수나 그 가족이, 단란한 소시민의 모습이나 차원이 다른 고민꺼리 같은 것을 부러워하지는 않았을까요.




어떤 이는 이러한 부러움과 시기심을 건강하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이용하는 한편,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방식으로 감정을 소모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소유하거나 달성하는 데에는 시차가 있거나 가치의 차이도 분명 있습니다.

나보다 먼저 가진 사람, 나보다 좋은 성과를 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보다는 진정으로 축하하고 응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직장생활 시 진급이 늦어 맘고생을 한 저는 앞서가는 동료나 후배들을 진심으로 축하함으로써 그간 경쟁자로서 껄끄러웠던 관계가 해소되고 오랫동안 연락을 유지하는 등 좋은 관계를 맺은 예가 많습니다.

또한, 상대방이 운이 좋아 잘 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을지 가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럽다’는 말에는 저절로 나의 ‘열등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의 상황이 열등하다는 것과 나를 자책하는 말을 스스로에게 계속 반복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부러움을 곱씹을수록 자기의 마음이 상처를 받을 뿐입니다.

‘부럽다’라는 말은 스스로 허영심을 부추기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부러움 표현에 그칠 때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축하하는 게 아니라, 배배 꼬인 마음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저 “멋지다” “잘할 거다”라는 나의 마음들만 체로 걸러 전한다면 상대방도 나의 응원에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관계도 좋아질 것입니다.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그 감정이 도를 넘어 질투하고 있다면 그건 그 순간만큼은 내 삶보다 그의 삶에 더 관심이 많은 상태라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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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의 비교는 나를 ‘비’ 참해 지거나 ‘교’만 하게 만들 뿐입니다.

타인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말고 어제의 나보다 나은 삶을 위해 전진하는 게 더 건강한 사고방식입니다.




자신의 일에 몰입하다 보면 남의 인생을 부러워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지인에게서 정말 부러움을 느낀다면 그 부러움을 동기부여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 계발을 통해 업그레이드할 기회로 삼으면 되는 것이지요.




제가 현재 부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은 이 것입니다.

먼저 퇴직한 선배님께서 색소폰 연주를 아주 잘하고 있더라고요.

퇴직 후 첫 해에는 초보 수준이었으나, 둘째 해가 되면서 그 선배님이 보내준 공연 영상에서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프로 뮤지션이 되어 있었습니다.

진심 부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도 팬플룻이라는 악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팬플룻을 잘 다루기 위해 조바심을 내지는 않습니다.

그저 계이름만 소리 낸다 할지라도 제 마음이 좋으면 되지 않을까요.

관악기라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투’하고 내뱉은 나의 투박한 숨이 청아한 소리로 변해졌을 때 느끼는 희열 같은 것이지요.

색소폰이나 트럼펫 같은 악기는 소음 때문에 집에서 연주할 수 없지만, 팬플룻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지요.



또 한 가지 부러워하는 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자신의 취미를 경제생활과 결부시킨 ‘퇴직자의 로망’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제 입사동기 Y는 어려서부터 갈고닦은 실력으로 퇴직 후에도 서울 모처에서 탁구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매일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즐기고 살고 있습니다.

많지는 않을지라도 어느 정도 유지되는 수입은 그의 생활에 있어 활력소가 되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경제적인 것보다는 건강관리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류가 그의 만족감을 극대화시킨다고 합니다.

어느 한 해는 입사동기회 신년회를 Y가 운영하는 탁구장에서 개최하기도 했으니 참 부러운 친구입니다.




인생이란 제 멋과 맛에 취해서 사는 것 아닐까요.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가능하다면 남을 도울 여력도 가지는 것 말이지요.

그것이 품격 있는 장년의 삶인 듯합니다.




지금도 지인들로부터 부러운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꽤 좋은 주식투자, 해외골프나 크루즈 여행, 독일 3사 차량을 구입한 일 등이 들립니다마는 이것들이 품격 있는 장년의 삶은 아닙니다.

부러움에 빠져 나의 마음을 스크래치 내기보다는 견고한 나의 삶을 유지하며 나의 강점을 찾아 성장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장기하 가수의 노래가사를 되새겨 봅니다.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전혀 부럽지가 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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