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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엄산에서 오겜 참가자 될 뻔한 썰

by 페트라
지난 무더운 여름날, 지친 몸을 쉬려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원주에 있는 뮤지엄산을 방문하였습니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놓고 올라가는 길은 비록 짧은 길이었지만 무더위 때문에 등에 땀줄기가 맺히는 강행군(?)이었습니다.

입장을 하고 나서 바로 시원한 에어컨 속에 뜨거운 아메리카로 이열치열하기를 기대했던 저는 또 한번 도전을 받았습니다.


비록 길지 않은 길이었지만 미술관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처음부터 이런 길인줄 알았다면 그리 힘들지 않았을텐데, 입장 즉시 시원한 실내 휴식을 그려왔던터라 그 힘듦은 세 배였습니다.


게다가 도슨트님의 설명은 왜이리 긴지요.

(사실 햇빛과 함께 걷는 미술관까지의 입장 길은 햇빛가리개 우산도 주어졌고 군데군데마다 이어지는 도슨트님의 설명은 명쾌하고, 짧고, 유익했습니다마는 저를 삶아 익히려는 날씨와 시원한 냉장고를 기대했던 저의 바램과 달라 이리 표현했습니다. 도슨트님! 죄송합니다)

이 날 저는 도슨트님 덕에 제 영혼이 살찌워졌으며, 또다시 방문하고 싶은 생각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오징어게임을 왜 얘기했을까요.

아시다시피, 이 미술관은 일본의 건축가로 전세계적인 건축 트렌드를 선도하는 안도 타다오가 설계했습니다.

콘크리트 마스터이자, 직선과 곡선의 제왕인 그가 설계한 뮤지엄산!

저는 그 날 여러 가지를 봤지만, 가장 감명깊었던 것은 그 유명한 중정(中庭) 동그라미, 세모, 네모였지요.


건축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던 저에게 그 날의 방문은 “우와, 형태가 예술이네…”라는 탄성을 연속 내뱉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저의 팩트는 여기까지이고, 지금부터 그 날의 감흥과 약간의 가공을 통해 팩션을 쓰렵니다.




어째서 저는 이 평화로운 공간에서 느닷없이 피비린내 흐르는 서바이벌 오징어 게임의 그림자를 보게 된 걸까요?

저기요, 저 진짜 미술 보러 온 거예요. 절대 게임하러 온 거 아닙니다

저희 부부는 분명 힐링하러 그리고 자연 속에서 예술을 느끼고, 명상 같은 평온을 경험하겠다고 뮤지엄산에 왔지만, 도슨트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희를 마치 딱지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게임 참가자로 아시는 듯 했습니다.


여러분! SAN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상냥하신 도슨트님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시뻘건 모자를 쓴 유격장 조교로 돌변하였습니다.

헉! 한참 들어가니 뮤지엄산의 상징과 같은 조형물도 빨간색이었습니다.

게임 참가자들은 오징어 게임 세트장같은 미술관 입구까지의 비포장도로를 “유격!”, “유격!!” 헉헉거리며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산(빨간 구조물).jpg


누가 봐도 체력 테스트요,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드디어 미술관에 도착하여 무더위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슨트님은 쉴 시간도 주지 않고 무리들을 마구 굴렸습니다.


우리는 네모, 세모, 동그라미의 공간을 돌면서 게임 참가자로서의 운명을 잠시 잊은 채 꽤 수준높은 문화체험에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네모는 관리자, 세모는 병사, 동그라미는 노동자…

그럼 우리는 뭐라 할까요.

아항... 그냥 관람자였지요. 그저 잘 즐기면 되지요.


안도 타다오 건축가의 손길이 닿은 돌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웅장한 돌덩이들이 묵묵히 서서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이때 제 뇌리를 스친 생각은 바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였습니다.

돌무더기 뒤에 숨은 시커먼 관리인 아저씨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며 휙 돌아보면, 세상모르고 셀카를 찍던 사람들이 얼음처럼 굳어야 하는 것이죠.

혹여 몸이라도 들썩이는 날엔, 갑자기 옆에서 스윽 나타난 분홍색 옷의 진행 요원에게 <탈락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장총이 난사될지도 모른 모른다는, 아주 섬뜩한 상상마저 들었습니다.


오겜(무궁화).jpg


명상관에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통창 너머로 펼쳐지는 숲의 전경을 보며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어야 마땅한데, 저는 순간적으로 바닥의 문양이 ‘달고나 뽑기’의 원형 틀로 보였습니다.

각자의 자리에 앉아 집중한 이들이, 혹시 저 달고나 모양을 완벽하게 뜯어내지 못하면 그대로 땡! 하는 소리와 함께 탈락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옆자리 관람객의 달고나는 별 모양인데, 제 것은 하필 우산 모양이었습니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에라 모르겠다, 혀로 핥아내자. 죽는 것 이상 더 하겠어?’라는 해괴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지 뭡니까.


오늘 둘러본 미술관 내부는 그냥 감상하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계단, 길다란 복도, 천창으로 들어오는 채광마다 관람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도슨트님이 우리 뇌에 부어주시는 지식의 향연을 만끽했습니다.

숨겨진 미션이 계속 나올 것 같은 구조였습니다.

“지금부터 작품을 보고 우리가 의도한 감상문 3줄을 쓰면 통과입니다”라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습니다.


산(채광).jpg


채광을 중시한 모든 구조물은 보는 각도와 순간순간마다 다른 형태를 보이며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빛보다 두근거림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저기서 기관총이라도 발사되는 건 아닐까’

‘저 벽면 뒤에 가면 딱지 들고 있는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닐까’

‘모든 걸 끝내고 퇴장할때면 동그라미, 네모, 세모가 그려진 명함으로 재방문을 꼬드기는 건 아닐까’


오겜(명함).jpg


하지만 다행히도, 마지막 미션은 기념품 샵에서 돈 쓰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무사히 탈출했고 아니, 관람을 마쳤고, 모든 관람자들이 낙오없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456억원도 주어지지 않았음은 기쁨일지 실망일지...




결론은 그렇습니다.

뮤지엄산은 오겜이 아니라 내 일상에서 벗어나는 짧은 ‘엔딩 크레딧’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물론 다음에는 몸을 좀 만들고 와야겠습니다.

혹시 모를 고난도 미션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그리고 딱지라도 하나 들고 올까도 싶습니다.


많은 분이 다녀가셨겠지요마는, 이 곳에 아직 들르지 않은 분들게 권합니다.

곧 개통될 강원도 원주행 지하철에서 딱지를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체력을 쌓아 가지고 꼭 동참하시라구요.


뮤지엄산에서의 오징어 게임은 다행히 저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저는 한층 더 특별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뮤지엄 산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처럼 기발한 상상력이 우리의 일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비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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